네줄 冊

악의 평범성 - 이산하 시집

마루안 2021. 3. 15. 21:43

 

 

 

이산하 시인이 드디어 시집을 냈다. 22년 만에 나온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예전에 어쩌다 보니 그의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읽었다. 인상 깊은 시집을 읽으면 시인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 따라온다. 이후 <생은 아물지 않는다>라는 그의 산문집을 읽고 이 시인을 온전히 마음에 담았다.

 

시대와의 불화 때문인가. 너무 긴 시간 시집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영영 시 쓰기를 단념한 것인가 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하면서 기다렸던 시인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아주 묵직한 시집이다. 시인도 내용도 출판사 창비하고 딱 어울린다. 빌려온 것이지만 <악의 평범성>이라는 제목이 그의 시와 잘 맞는다.

 

문학계에도 권력이 있어 가끔 들리는 메이저 출판사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창비에서 나오는 시집은 빼놓지 않고 들춰본다. 창비 시집이라고 다 좋기만 할까. 나는 메이저보다 2등에 더 눈길이 가기에 유명출판사에서 나온 함량 미달의 시집을 발견할 때면 되레 환호를 보낸다.

 

메이저 좋아하더니 꼴 좋다. 뭐 이런 심보랄까. 몇 달이면 나올 수 있는 시집인데도 메이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기 위해 몇 년씩 기다리는 시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팔팔했던 시들이 시든 배춧잎처럼 유통기한을 넘겨 시들시들 매가리가 없다.

 

그런 시집에서 과연 몇 편이나 독자의 공감을 얻을까. 제철 과일이 맛있듯 시에도 분명 유통기한이 있다. 북아현동 골목길은 흔적 없이 사라져 아파트가 서 있고, 4천 원짜리 김치찌개를 먹었던 134번 버스정류장은 벌써 없어졌는데 난방기 고장난 한겨울에 부채를 들고 있는 격이다.

 

이산하 시인 정도면 창비에서 시집 내자고 몇 년 전부터 제안하고 채근했을 것이다. 그의 시가 유통기한이 길고 무겁지만 상징성이 뚜렷해 현실과 잘 맞기 때문이다. 이산하라는 필명답게 그의 울분과 눈물은 한반도 지도를 적시고도 남는다.

 

그가 고초를 겪고 감옥에 간 것도 장시간 시를 쓰지 못했던 것도 4.3 때문이다. 늦었지만 다행히 문재인 정부 들어 많이 조명을 받고 있으나 여전히 4.3의 상처와 치유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시집에 손가락을 벤 것처럼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문구가 있다.

 

약 40년이나 시를 썼지만
아직도 내 언어의 날에는 푸른빛이 어리지 않았다.

 

*시, <푸른빛> 일부

 

윤동주, 백석, 김수영, 기형도,, 내 가슴에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는 시인들이다. 단 한 권의 시집을 남겼거나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모두 주옥 같은 시들이다. 이산하의 시 또한 편 수는 많지 않아도 한국 시단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문재가 쓴 추천사가 더욱 절절하다. 

 

여기 이 시집이 시인의 끝이다.
샤먼이다.
시여,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이문재 시인 추천사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그 꽃들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