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김윤배 시인의 시에 푹 빠졌다. 시인은 해방 되기 전인 1944년에 태어났으니 원로 시인 중에도 맏형 격이다. 2년 전에 시집을 냈는데 이번에 새로운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가 현대시학에서 나왔다.
등단 40년이 다 되어 가는 김윤배 시인은 이번이 몇 번째 시집일까. 세어 보지는 않았으나 열 권은 넘고 스무 권은 안 된다. 나는 김윤배 시집을 몇 권이나 읽었을까. 다섯 권은 넘고 열 권은 안 된다. 그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몇 년전부터 이 사람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착하게 살아 온 인생과 곱게 늙은 노년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빨다 밥을 먹었으나 그 시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속담 의미와 상관 없이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시집에 말랑말랑하고 달착지근한 미사여구만을 나열한 것은 아니다. 묘비명처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생이 몇이나 있을까. 시인의 눈길은 이 세상 어떤 것도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 시인의 시적 영역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의문은 시집에 실린 낯선 단어들에서 더욱 굳어진다. 사전을 찾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는 지명도 여럿 있다. 그 영역도 세계 곳곳이다. 터키, 시리아, 코카서스, 그리스, 러시아, 쿠바, 티베트와 네팔까지 중세 수도원부터 소설 속 지명까지 두루 호명한다.
*황홀한 착란의 시절은 스치듯 지나갔다
유폐는 선택이었다, 밤은 며칠씩 계속되었으나
잠시 행복했고, 늘 얼어 있는 입술로 불행했다
얼어 있는 입술을 이 생에서 녹일 수 없다
*<다음 생까지는 멀고> 일부
시집을 완독하고 나면 사랑의 아름다움, 삶에 대한 시인의 긍정적인 사고 방식 등이 느껴진다. 평생 공부를 한 지식인의 교양과 심성 고운 소년처럼 맑은 눈물은 담고 있는 시인이다. 큰 굴곡 없이 살아 온 시인의 인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간 초등학교 교사와 교육청 장학관을 지냈고 교장 선생을 하다 정년 퇴임을 한 평생 교육계에 몸을 담았다. 아무리 놀고 먹지 않았다 해도 직장 생활에서 월급 안 나올 걱정과 잘릴 걱정 없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시집 뒤편에 으레 붙기 마련인 평론가나 동료 시인의 해설 대신 자신의 산문을 실었다. <시에 대한 생각>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시에는 어떤 마법성이 있어 독자를 중독에 이르게 할까. 시에는 즐거움, 즉 쾌락의 마법성이 있고 세상의 사물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인식의 마법성이 있으며 독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마법성이 있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고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어 고달픈 요즘이다. 거창하게 구원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을 풀어주는 싯구에 조금씩 중독은 된다. 오래 곁에 두고 읽고 싶은 아름다운 시집이다.
'네줄 冊'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 조수경 (0) | 2021.02.16 |
---|---|
한 남자 - 히라노 게이치로 (0) | 2021.02.15 |
나는 불타고 있다 - 손석호 시집 (0) | 2021.02.09 |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 김태완 시집 (0) | 2021.02.08 |
나는 쓰레기 없이 살기로 했다 - 비 존슨 (0) | 2021.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