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나는 불타고 있다 - 손석호 시집

마루안 2021. 2. 9. 21:50

 

 

 

보름이 지났으니 이미 작년이다. 지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몇 권의 시집을 주문했다. 망할 놈의 코로나가 진정되기는커녕 갈수록 기승이다. 일찌감치 연말연시를 집콕으로 보낼 요량이었는데 이럴 때는 책이 최고다. 더울 때나 추울 때 책 만한 도피처가 있던가.

 

평소 매일을 새날이라 여기며 살기에 새해를 특별히 기념할 것도 없다. 달콤한 케이크 대신 있는 듯 없는 듯 소박하게 연말을 보내면서 틈틈히 시집을 읽을 수 있는 것이 큰 행복이다. 이번엔 제대로 골랐을라나. 모처럼 나와 딱 맞는 시인 하나를 만났다.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는 손석호의 첫 시집이다. 이 사람의 시를 읽자마자 면도날에 손을 벤 것처럼 싯구가 섬뜩하게 가슴을 훑었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분명 손가락 어딘가를 베긴 했는데 피는 나오지 않는다. 작은 통증을 느낄 때마다 확인을 거듭해야만 발견할 수 있는 상처다.

 

약간씩 가렵기도 한 이 작은 상처를 자꾸 문지른다. 드디어 조금 피가 나면서 상처다운 상처가 된다. 이것이 아물기까지 며칠이나 갈까. 이 시집이 그랬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상처를 자꾸 꺼내 문지르고 싶다. 아물기는 했던가. 아물 상처가 있기는 했던가.

 

손석호 시에는 가슴을 후벼 파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자고 있는 메마른 가슴을 자극한다. 세상에는 감당 못할 불행은 없다 했지만 누구든 가장 불행한 사람은 본인이다. 생전의 내 어머니가 죄 많은 인생이라고 한탄했듯이 당신을 꼭 닮은 나도 가끔 죄 많은 인생이라는 생각을 한다.

 

시집에는 죄 많은 인생들의 집합소다. 시인은 잘 나가는 사람보다 그늘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시인 또한 죄 많은 인생일 것이다. 죄가 많아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인생이어서 이렇게 공감 가는 시를 썼는가 보다.

 

*오른손이 의수인 그는

어선을 탔었다고 했다

 

노을이 도마 위 핏물을 벌겋게 덧칠하자

무쇠 칼이 고등어 배를 가르던 왼손을 놓아주었다

목장갑에 달라붙은 왕소금을 털어 낼 때

화구 밖으로 거세게 역류하는 화염

파르르 얼굴에서 출렁이는 난바다

석쇠를 뒤집는 팔뚝 근육이 로프처럼 팽팽하게 솟았다

 

*<간고등어> 일부

 

스릴러 영화 보듯 긴장감을 주면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구성된 문장이다. 두 손으로도 힘든 것이 뱃일인데 하나를 바다에 내 주었으니 속절 없이 배에서 내려야 했다. 그리고 고등어를 굽는 일이 생계가 되었다.

 

둘 다 머리 쓰는 것보다 몸을 잘 써야 하는 일이다.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며 익힌 이 기술이 부실하긴 하지만 그의 밥줄이다. 대신 먹물들의 특기인 잔머리 굴리는 일이 없어서 좋다. 땀 흘린 만큼 나오는 정직한 밥줄이다.

 

시집에는 소박한 기술로 밥을 먹는 밑바닥 인생들의 애환으로 가득하다. 바닥이 어두워서 더 살고 싶은 날, 살기 위해 매달렸던 줄이 끊어져 추락하기도 한다. 삶도 죽음도 살아 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 때론 문장에 담지 못하는 삶도 있는 법이다.

 

*홀로 외줄에 올라선다는 건

아무도 모르게

꼭 쥐고 있어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

 

이 구절을 읽다가 피식 눈이 흐려진다. 춥고 척박한 곳에서 자란 꽃이 더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역설적이게도 사는 일이 슬프지만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 긴 여운이 남는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