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트럭의 우울 - 고광식

마루안 2021. 2. 10. 21:56

 

 

트럭의 우울 - 고광식


폭설을 맞으며 폐업을 하는 피자집
상처를 긁어내기 위해 트럭이 2.5톤 짐칸을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이민다
피자 굽는 냄새에 행복하게 웃음 짓던
아이들의 표정을 짐칸에 싣고 나면
슬픔은 손으로 두드려 만든 피자처럼 쫄깃해진다
시린 눈송이는 환하게 불 켜진
철거 현장으로 문득 멈춰 서서 내린다
피자의 맛마저 떠올릴 수 없이 구겨진 차림표가
아무렇게나 부서진 벽돌과 함께 짐칸에 실리면
개업식 때 이벤트로 쏘아 올린 음악 소리만
쾅쾅 짐칸을 홀로 울린다
띁어낼수록 더 허기가 지는 가게 안
실내장식 소품들이 부러진 갈비뼈 드러낸다
하나씩 비워 감으로써
상처 난 살에 새살이 돋는 걸까
논고개로 택지 개발 지역 버스 정류장 앞
인도로 머리만 내놓은 트럭에 실리는
탁자와 의자가 쭉정이처럼 가볍다
푸른 꿈을 석 달 만에 접은 젊은 부부가
생살 돋는 날들을 헤아리는 듯 폭설을 맞고 있다
피자 가게를 잘게 부숴 짐칸에 실은
트럭이 부르르 몸을 떤다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 파란출판

 

 

 



달을 굽는 사내 - 고광식


빈 옷소매가 바람에 펄럭였다
팔월의 좁은 골목길로 흘러드는 별똥별처럼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오는 눈보라
한쪽 팔이 없는 사내가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뜨겁게 달구어진 팬에 반죽을 넣는다

신호등이 사내의 삶 앞에서 항상 붉은색이어도
아이들의 기호가 돌고래자리인지 독수리자리인지를 생각한다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마케팅의 제1원칙이라고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인다

밤하늘의 검은 여백을 조절한 팬 앞에서
반죽이 금강석이 되도록 달을 구우려 했지만
뚜껑을 여니 이번에도 실패다
검게 타서 반은 숯덩이가 된 분화구
달을 굽다가 실패하면 어떤가

사내는 예열된 팬에 또다시 반죽을 떠 넣으며
과자처럼 바삭하지는 않지만
자꾸 손이 가는 토끼를 품은 달을 굽는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스쳐 지나간 얼굴들
환상통을 앓으며 그들을 굽고 나자
불꽃이 분출하는 분화구가 만들어졌다
갈색의 달이 생크림 모자를 쓰고 있다





*시인의 말

내가 던진 문장들이 구름으로 흘러 다니다가

비가 되었다

문장이 아닌 것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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