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날 테면 날아보게 - 황동규

마루안 2021. 1. 29. 22:08

 

 

날 테면 날아보게 - 황동규


15년 전 일인가? 어느 가을날 모르는 사이에
날벌레 하나 눈 한가운데서 날았다.
아무리 해도, 정신 멍해지도록 눈 꽉 감았다 떠도,
내보낼 수 없어
신경을 내려놓았지, 날건 말건!
생각을 바꿨는지 딴청에 지쳤는지
첫눈 내릴 무렵 못 이기는 척 눈에서 나갔던 그가 며칠 전 돌아왔다.
끈질기에 나는 폼이 자리 도로 내달라는 것.

그간 나가 있어준 것만도 고맙긴 고맙네.
8년 전 겨울 동해 죽변항(竹邊港).
눈송이들 희끗희끗 춤추며
검은 물결에 몸 던지는 밤바다에 취해
2미터 넘는 축대에서 추락.
그때 등 근육 그러쥐고 비튼 통점, 등 오른편에 자리 잡고
나갔다 들어오고 들어왔다 나가고
자리 비운 때도 늘 거기가 켕기는데,
날벌레도 날던 곳에 와 날고 싶지 않겠는가?

발코니 식물들도 하나씩 옷 갈아입으며
'이게 본래의 나요!' 하는 가을날,
등 통점은 안티플라민 파스 붙여가며 달래지만
'나는 눈 속에서 날도록 태어난 자요!'를 밖으로 모실 방도는?
없다. 말끔히 걷힌 늦가을 안개처럼 없다.
그저 문득 생각나 말해준다.
'이 눈엔 때로 뜨거운 물이 왈칵 넘치곤 하네.'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

 

 

 

 

 

 

안개 - 황동규


눈뜨자 정신이 뽀얗다.
드디어 내가 흐려지기 시작했구나!
더듬더듬 안경 찾아 끼고 창밖을 내다보니
8층 아래 주차장이 안 보인다.
그러면 그렇지, 새벽꿈은 멀쩡했는데
마음이 미리 알아채고 안개경보 내린 거지.
그런데 무슨 꿈이었더라?
길 건너 아파트 공사장에 드나드는 대형 트럭이
뿌웅 소리 낸다.
그래, 안개 속 방파제를 걷다가
등대 조형물 조그맣게 세워논 곳에서
안개경보 고동을 들었지.
그 소리 울리지 않았다면
잠결에 건너편으로 건너갔을까?
중도에 물에 빠져 허우적댔을까?

이 안개 개기 전
빌라들로 가득 찬 현충원 가는 길
그중 가장 멀게 가는 길에 남아 있는 낮은 담장 집
조그만 꽃밭에 속삭이듯 피워 있는 꽃들을 보러 가리라.
문 앞에서 복술이가 엎딘 채 꼬리를 흔들고
꽃들은 서로 이야기 나누다 '이제 오세요?' 표정 짓겠지.
참, 그 집도 지난해에 빌라 나라로 넘어갔어.
나 왜 이러지?
왜 이러긴? 내가 나에게 소곤댄다.
안개 낀 김에 모르는 척 한번 가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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