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원더우면 윤채선 - 피재현 시집

마루안 2021. 1. 27. 22:07

 

 

 

피재현은 이 시집으로 처음 접한 시인이다. <원더우먼 윤채선>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 이 책이 피재현의 두 번째 시집이다. 세상은 넓고 시인은 많다. 어느 책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지만 자주 써먹는 나의 표현 문구다.

 

출판사 걷는사람에서 좋은 시집을 많이 낸다. 먹이 잘 주는 사람에게 꼬리를 살랑거리는 개처럼 나도 한 번 믿음이 가면 자꾸 입을 벌린다. 이 출판사가 그렇다. 이 정도의 시집이라면 앞으로도 쭉 침을 흘리며 꼬리를 살랑거릴 수 있겠다.

 

이 시집은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다. 아마도 시인의 어머니가 윤채선 여사인 듯하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바로 어머니도 병석에 눕는다. 평생 남편을 원망하며 살았건만 막상 혼자가 되니 상심이 컸던지 바로 건강이 무너졌다.

 

남편 빈 자리에 대한 상심이 컸던 모양이다. 시인의 어머니뿐 아니라 생전의 내 어머니도 그랬다. 저 웬수, 저 화상 하면서 팔자 타령으로는 모자랐던 지긋지긋한 남편이었는데 죽고 나니 그래도 자식보다 남편이라 했다.

 

시집 속에는 시인의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지내다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풍경이 담담하게 담겼다. 어머니는 어눌해지는 말투와 다리에 힘이 빠져 가는 중에도 살기 위해 꼬박꼬박 온갖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그러면서 오래 살면 우리 아들 힘들어서 어쩌나 걱정을 한다. 시가 해학적이면서 때론 우화적이다. 그래서 죽음이 그리 어둡지는 않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죽음과 친숙한 정서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런 시에 관심이 많기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시에서 당겼다 밀었다 조였다 풀었다 하는 힘이 느껴진다. 이 시인을 늦게 알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이제부터 관심을 가지면 되니까.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자주 부음이 와
가을과 겨울 사이 봄과 가을 사이는 늘 그래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거래처 사장의 장모가 죽기도 해

가끔씩 부음이 오면, 한 생애가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잠깐 궁금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 보관함을 뒤져도
아버지 장례에 그들이 내 부의금을 확인하는 게 먼저야
그들의 조문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장례 내내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가
불쌍했고 아버지가 슬펐거든

아직 겨울이 시작되지 않았어
유실수의 어깨에는 무거운 열매들이 얹혀 있고
아직 바람이 못 견디게 차지는 않아
사실 죽음이 그리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려울 뿐

선친의 죽음이 그저 그런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사실은 그저 그런 일인데 우리도 그처럼 죽을 테고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어느 따뜻한 날은 좀 오래 살고 싶기도 하지만
더 이상 쓸쓸함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
그 쓸쓸함을 견딜 정도로 내가 뻔뻔해진다면
그건 가장 쓸쓸한 날이겠지

오늘은 두 죽음의 부음을 받았어
차례차례로 조문을 하고 한 곳에서는 점심밥을
다른 한 곳에서는 저녁밥을 먹고 술을 몇 잔 할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