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시사사 2020년 겨울호에서 만난 시

마루안 2021. 1. 8. 22:25

 

 

 

<시사사>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약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시판에서 상부상조하는 시인들 빼고는 아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사사가 변화를 했다.

 

가격도 파격적으로 내리고 시전문 계간지로 재탄생했다. 여전히 독자보다 시인들끼리 소통하는 내수용 잡지에 그치고 있지만 시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시사사의 목적처럼 독자의 사랑을 받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시사사 겨울호에 유독 눈길을 끄는 시가 보인다. 전영관 시인의 신작시다. 이 시가 나중 시집에 담겨 나올 때 성형수술을 하고 올지는 모르겠으나 눈과 입에 착 달라 붙는 시가 긴 울림을 준다. 책이든 잡지든 손에서 한번 멀어지면 다시 잡기 힘들다. 잊어버리기 전에 올린다.

 

 

원룸 - 전영관


소외가 지속되면 구면이 버겁다
익명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늘만 비추고 표정 없는 창문의 감정조절이 부럽다
가난하게 덩치만 큰 벽들이 도열한 골목을 걷는다

대문 옆 공터에
맨드라미가 한물 간 소프라노의 드레스처럼 시뻘겋게 꿈틀거린다
옆자리에 세든 해바라기가 월세를 못 냈는지 얼굴을 감추지도 못해 하늘로 치켜든다

창틈으로 노래가 쏟아진다
가요제 대상곡은
고음부가 장황하고 반주도 두껍고 느끼하다
중개인의 방 설명이 당선작 심사평 같이 이어진다
자신의 안목 실패에 대한 변명이다

평범함은 들어쌘 것들의 우호적 어휘다
내가 나에게 실망할 방이 필요하다

횡단보도에서 건너편을 바라보지 않는다
구면을 추가하고 싶지 않다
저기도 이 동네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메꽃처럼 담을 넘는다
선입견은 지체장애학교의 체육수업을 의심하는 것
희망이란 색맹에게 무지개를 보여주는 일

누군가를 끝까지 기다리는 도어록처럼 차가운 체온을 유지하고 싶었다

서향으로 급경사인 동네라 노을 요금이 공짜일 것 같다
마을버스는 못 올라오겠지
노을이 진한 날이면 초혼하듯 탁본하듯이
한지를 흔들어 구름의 요철과 색감을 떠내곤 했다
시집가는 누이에게 주었다면 구연동화가 될 것이다

여기만도 못한 비포장 소읍에서 살았다
구두에 엉겨 붙는 흙이 혐오스러워지면 생활의 곤비(困憊)를 곱씹었다
늙음이란 달력 같이 융통성 없는 것들에게 화풀이하는 일이다
중개인이 창문 크기에 대한 취향을 굽히지 않는다
늙은이의 경험론은 젊은이 앞의 편협일 뿐이다

오르골의 태엽을 감을 때마다
일주일이라는 억지를 생각한다
희망이 뚱뚱해졌다는 충고를 듣지만
이유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일 동네를 걸었는데 사람은 없고 그림자의 방향만 바뀌었다
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쓸쓸함에 대한 호기심 따위일 것이다
이 동네에 방을 얻기로 한다

애써 외면하다가
그 슬픔을 허락하고 마음껏 침묵하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께 평화를 간구하다가 기다리다가
당신을 닮고 싶다는 마지막 불가능을 전했다


*시사사/ 2020 겨울호,
*전영관: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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