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십일월 - 허연

마루안 2020. 11. 23. 19:53

 

 

십일월 - 허연


십일월에 나는 나쁘게 늙어가기로 했다
잊고 있었던 그대가
잠깐 내 안부를 들여다본 저녁
창문을 열면
늦된 날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절망의 형식으로 이 작은 아파트는 충분한 걸까
한참을 참았다가
뺨이 뜨거워졌다
남은 것들이 많아서 더 슬펐다

낙타가 몇 번 몸을 접은 후에야
간신히 땅에 쓰러지듯
세월은 힘겹게 바닥에 주저앉아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 서쪽으로는
노을이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육군 00사단 교육대
기다란 개인 소총을 거꾸로 들고
내 머리통을 겨누었다
십일월이었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미친 듯이 슬펐는데 단풍은 못되게 아름다웠다
신전 같은 산 그늘이 나를 덮었고
난 죽지 못했다

늙고 좋은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만 좋았다

십일월이 그걸 알려줬다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어떤 거리 - 허연


서쪽으로 더 가면
한때 직박구리가 집을 지었던 느티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7년째 죽어 있는데
7년째 그늘을 만든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는 거리와 닮았으니까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보통은 별이 떠야 알 수 있지만
강 하구에 찍힌
어제 떠난 철새의 발자국이
그걸 알려줄 때도 있다
마을도 돌고 있는 것이다

차에 시동을 끄고 자판기 앞에 서면
살고 싶어진다
뷰포인트 같은 게 없어서
나는 이 거리에서 흐뭇해지고
또 누군가를 기다린다

단팥빵을 잘 만드는 빵집과
소보로를 잘 만드는 빵집은 싸우지 않는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커다란 진자의 반경 안에 있는 듯한
안도감을 주는 거리

이 거리에서 이런저런 생들은
지구의 가장자리로 이미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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