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발이 아름다운 이유 - 이강산

마루안 2020. 11. 23. 19:37

 

 

백발이 아름다운 이유 - 이강산


빠른 길 피하려 샛길 돌아간 보은군 마로면 나무의 머리카락이 희다
한 잎 남김없이 손을 턴 나무는
저만큼 보아도 나무라는 듯 일가를 이루었다

문 닫힌 마로면 우체국 앞에서 내 그림자와 악수를 나눈 시인의 머리카락도 희다

귀밑이 하얗게 늙어버린 낱말 몇 분,
겨우내 아랫목에 내주고 월동한 탓이려니

그리하여 시인도 저만큼부터 한 그루 나무다

말하자면 그런 까닭이다
매일 밤 시인을 비우고 읍내로 귀가하는 시내버스의 머리가 희끗희끗 나부끼는 것은,

새까맣게 백발이 무르익는 것은
어느 땐가 교목의 예감으로
생의 순간순간 아낌없이 손을 비운 탓이려니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즐거운 예감 - 이강산


먼먼 석기시대엔 비둘기호를 타기도 했지만 광속의 세월에 이보다 더 느릴 수는 없으므로 무궁화호를 타고 장례식장에 가면서

어느 밤 타박타박 무궁화호를 타고 영등포 장례식장에 들러 너무 빨리 떠난 김 형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기억이며 또 어느 밤 남원의 상가를 다녀오며 무궁화호 계단에 앉아 덜커덩덜커덩 졸다 깨다 목뼈가 부러질 뻔한 기억이며

낡은 아궁이 같은 몸속으로 서리서리 얽힌 기억의 장작들이 피워 올리는 연기가 매워서

연기를 헤치고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제멋대로 걸음을 멈추고 담배 한 대씩 태우던 열차의 느긋함이 그나마 나를 주검 멀찌감치 부려놓았던 것이어서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듯 종종 주검을 향해 떠날 때마다 차라리 아주 느려서 끝내는 닿지도 못할 열차에 대한 예감을 은근슬쩍 즐기는 것이다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 <하모니카를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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