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행이다 비극이다 - 유병록

마루안 2020. 11. 20. 22:08

 

 

다행이다 비극이다 - 유병록


일어나고 싶지 않아 다시 눈 감고 싶어 울고 싶어 마음껏 소리칠래 아침부터 취해버릴래

다 그만두고 싶은데

일어나서 세수를 하지 아침 먹고 가방 들고 출근을 하지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지 점심도 먹고 담배도 피우지

나를 일이켜 세우는 건 그저

습관
배고픔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
월급날

슬픔은 얼마나 무력한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그저 그런 것들

쓸쓸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인데
내 집이 있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넓고 깨끗하면 좋겠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월급이 좀더 오르면 좋겠어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어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어 그럴 듯한 새 시집을 내고 싶어

보잘것없는 욕망의 힘으로
나는 살아가지

얼마나
다행하고
다행한
비극인지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창비

 

 

 




장담은 허망하더라 - 유병록


다짐은 허망하더라
너를 잊지 않겠다 장담하였는데

세월 가더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고
휴가도 가더라

공과금 고지서가 날아오고
전세 계약도 끝이나고

살아가더라
세계는 멸망하지도 않고
나는 폐인이 되지도 못한 채

웃기도 하더라
새 차를 살까 이사를 갈까
재밌는 책이나 영화가 없을까
찾기도 하더라

사람은 숨이 끊어질 때가 아니라
기억에서 사라질 때 비로소 죽는 거라는 말
자꾸 새겨도

너를 기억하지 않고 지나는 하루도 있더라

하루는 이틀이 되고
이틀은 사흘 나흘이 되더라

너는 나타나더라
슬쩍 나타나서 우리 함께한 시절을 떠올리더라
나를 꾸짖는 모습은 아니더라

우리 함께한 세월은 하루하루 멀어지고

장담은 허망하더라
허망조차 허망하더라


 


# 유병록 시인은 1982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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