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소풍길 - 이철수

마루안 2020. 10. 9. 21:36

 

 

바람의 소풍길 - 이철수


인생은 재생되지 않는다는 걸
풍매화 쓸쓸한 눈빛으로 읽고 갈 때
울컥 제 삶을 다 쏟아놓고 진저리치는
동백, 에둘러 가는
저이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어떤 생이라도 기꺼이 복사할 수 있다면
융숭 깊은 이 봄날의 온기를 끓여
장을 담겠네

이번 생에 불려나온 햇나비처럼
가벼이 발뒤꿈치를 들고 길 떠나는
그대여,
어느 시절은 무릉도원 덜큰한 도화 아래
뒹굴다 가고
어느 날은 건널 수 없는 진창의 에움길을 돌고 돌아왔으니
개털 같은 유랑의 날들
한 줌 시래기같이 부서지던 헛헛한 사랑아,

이제 바람이 잔 저녁,
빈손으로 떠나는 황혼역에서 차표를 사고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들국같이 쓸쓸한 마음을 흔들며 그대
다녀간 세상의 길들을 헤아려 보네


*시집/ 무서운 밥/ 문학의전당


 


 

내 영혼의 짐 - 이철수


세상에 와서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 나는 오늘도 무거운 내 짐을 생각하노니, 당신에게서 꾸어온 말씀의 자루를 메고 배내옷 같은, 젖동냥 같은 쿰쿰한 허기를 지긋이 타이르며 예까지 걸어왔으니, 나를 기른 가난한 어머니의 눈물이거나 다 닳아서 만져지지 않는 먹먹한 슬픔의 실금이거나, 나는 격랑이었으니 바람에 흔들리며 온 쪽배였으니 스스로 침몰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빛과 어둠의 위태위태한 경계에서 나는 그림자 없는, 한낱 작은 이파리였으니




# 이철수 시인은 전남 영암 출생으로 1998년 <문학춘추>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벼락을 먹은 당신이 있다>, <무서운 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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