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성북동에게 - 최성수

마루안 2020. 7. 23. 22:37

 

 

성북동에게 - 최성수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으라

자본과 개발의 밀물 속에서도 그대
거대한 도시 서울에 홀로 서 있으라

마을 밖에서는 재빠르게 변화의 시간이 흐르고,
탐욕이 집을 삼키고 마을을 삼키고 마침내는
인간마저 송두리째 먹어치우는 시대

작은 골짜기 손바닥만 한 동네로
멈춘 듯 그대 서 있으라
비탈과 골목과 이웃이 어울려 빚어내는
낡은 것의 아름다움을 그대, 간직한 채 남아 있으라

하나쯤은 시간을 거슬러 존재하는 것이 있음을
하나쯤은 세상과 멀치깜치 떨어져 살아가는 것도 있음을

그대를 통해 느끼리니
오래 그대로 견디며 서 있으라,

성북동이여


*시집/ 물골, 그 집/ 도서출판 b

 

 

 

 

 


성북동 산 3번지 그 집 - 최성수


그리운 것은 모두 두고 온 그 마을에 있으니,
성북동 산 3번지 비탈길을 오르면 나는
세월을 거슬러 소년이 된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집을 갖게 된 아버지는
마당 귀퉁이에 작은 화단을 꾸몄다
농부인 아버지의 기억이 담겼던 그 집
삼백만 원에 샀던 무허가 블로크 집에서는
한겨울이면 대접의 물이 꽁꽁 얼었다
세월처럼 바래고 낡아 마침내는 제 몸조차 가누지 못했던
그 집
세 살짜리 계단*을 걸어올라 한참 숨이 차야 만날 수 있던 녹슨 철대문과
비가 오는 날이면 청량리역에서 기차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던 다락방
한양도성을 마주보며 양지바른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마을에서
나는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마침내는 아버지가 되었다
성북동 산 3번지
철거반과 맞서 똥물을 퍼부으며 싸웠던 사람들이 눌러 살던 곳
제 몸을 부숴버린 블로크 대신
새로 벽돌집을 지은 아버지는 담장 아래 장미를 심었다
오월이면 담장을 넘어 늘어지던 장미는
재개발의 광풍을 먹먹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버지와 함께 심은 향나무도
늙어 숨을 거둔 그 집
집집마다 대추나무 한 그루씩 심어 가을을 맞았던 그 동네
이제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버리고
나이 든 어른들만 옛 집처럼 늙어가는 곳
3번지를 날던 비둘기가 사라지고 남은 하늘은
오늘도 여전히 청청 눈부시다

그리운 것들은, 다 두고 온 그 마을에 있으니

성북동 산 3번지 비탈길을 오르면 나는
시간을 거슬러 소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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