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붉은 날의 가계도 - 정훈교

마루안 2020. 7. 21. 21:48

 

 

붉은 날의 가계도 - 정훈교


핏물처럼, 낙하하는
신음을 본다

(당신은 그것을 노을이라 했고, 절정이라고도 했다)
 
쓸 수 없는 것들과 이미 쓴 것들과 써질 입술이 포개어져 침대를 뒹굴었다

이 새벽에도 지지 않는
당신의 분홍 입술은

자작나무를 닮았다,

베어 물면, 물컹, 터지는
붉은 신음, 그 어디에도 없을

하얀 무덤 하얀 무덤

긴 통로를 지나,
웜홀과 두 개의 무덤은
행성 K098로 이어지는, 또 다른 流星

무너지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당신의 갈비뼈는, 밤새
지문에도 닿지 않던 붉은 사막을 추억한다.

가르강튀아를 겨우 빠져나와, 제 홀로
별이 된, 나와 당신의

그, 붉은 가계도


*시집/ 나는 혼자지만, 혼밥이 좋아/ 시인보호구역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 정훈교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폭우였다가, 모든 것이 폐허였다가, 모든 것이
바람으로 흩어지는, 소읍의 밤

돌 깨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 낮달이 비틀거리며 골목에 드는 소리, 종점에서 돌아 나오는 시외버스 엔진 소리, 문득 듣다가 고요해지는 문이 있다

열기 전까지 문이 아니라 창(窓)이었던 당신이 있다 천천히 열려다가 덜컥, 눈 맞은 경칩에 이르러 울음을 쏟아내던 당신이 있다, 천장을 향해 발라당 누운 밥상 다리를 보며 어느 문으로 왔을까 고요에 떨다가 밤새 독기(毒氣)를 품은 적이 있다 널브러진 오이소박이며 호박잎을 보며 그 모두가 장판의 얼룩으로 남아 전통문양을 이루던,

사춘기를 통째로
건너간 문이 있다

몇 번의 문을 지나 거뭇해지고
몇 번의 문을 지나 달거리를 시작하는, 소읍(小邑)의 밤

온통
환한 문이 있다고 치자

듣다가 문득 고요해지는, 환한 門이 있다고 치자

(수구릿재 밤길은 사방이 온통 어둠뿐이어서 발자국마저 유령처럼 논밭을 떠돌아다녔다, 마을회관에 부딪힌 발자국 소리는 제 풀에 놀라 비명을 지르곤 했다. 늘 그렇듯 모든 소리들은 저 문을 통해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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