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겸손한 유신론 - 김형로

마루안 2020. 7. 20. 22:25

 

 

겸손한 유신론 - 김형로 


다른 곳은 몰라도 사막에서만큼은 
분명 신이 있는 것 같다 

생명이 있을까 싶은 그곳에 신은 
한 동물을 그의 설계대로 살게 하셨다 
여닫이 콧구멍과 지방을 저장하는 등의 혹, 
널찍한 발바닥에 별을 읽는 천리안, 가시마저 씹는 맷돌 같은 혀와 입 

신은 고행의 수도자를 
고해의 사막에 살게 하셨지만 
낙타는 원망 대신 무릎을 땅에 매일 꿇는다 그것도 고마운 목숨이라고 

누군가가 
저 자신을 만든 후 
저를 위해 저 끝없는 사막을 펼쳐 주셨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낙타 앞에서 나는 겸손한 유신론을 읽는다 


*시집/ 미륵을 묻다/ 신생 

 

 




늙은 사자 - 김형로 


대학병원 수납 창구 앞 
얼굴에 저승꽃 만발한 노인이 옆의 아내에게 소리를 지른다 
다른 사람은 돈 있으니 수술하는 거지! 

꿈쩍 놀란 눈총들이 일제히 꽂히고 
번호표 든 여자들 수군거린다 
말없이 바라보는 남자들 속에서 
이해합니다 아버님, 나는 고개 숙인 채 
젖은 눈으로 아버지를 닦는다 

그는 한때 태풍 속이라도 걸어 들어갔을 가장이었으리 
바위만큼 단단했던 숫사자 시절이 있었으리 
옛말에 사내는 돈 못 벌면 숟가락 놔야 한다 했지만 
요즘 어느 사내가 사자처럼 사는가 
고양이 소리로 방안 골골거리며 
미운 정 고운 정이란 이름의 애완으로 살지 않는가 
그래도 솔가한 본능은 살아남아 저리 으르릉거리는 것이다 

폐 끼치고 갈 수 없다는 수컷의 칼칼한 성질, 그러나 갈기 다 빠진 늙은 사자의 눈물나는 포효, 자식에 몰빵한 식민과 전쟁세대의 쓸쓸한 퇴장 

수술해라, 안 한다, 몇 번 옥신각신 하다가 
마지막 사자후가 농한 감처럼 퍽, 바닥에 터진다 
죽어도 내가 죽지 니가 죽나! 


 

 

# 김형로 시인은 1958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17년 <시와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다. <부산일보>와 <경향신문>에서 기자를 지냈다. 부산작가회의, 부산시인협회 회원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동자 하나 없는 섬을 걸었다 - 이원하  (0) 2020.07.22
붉은 날의 가계도 - 정훈교  (0) 2020.07.21
철 - 이소연  (0) 2020.07.20
다황을 긋다 - 이무열  (0) 2020.07.19
분꽃 - 김왕노  (0) 202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