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역설적 유전자 - 정진혁

마루안 2020. 6. 22. 21:59

 

 

역설적 유전자 - 정진혁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유전이 아닐까
나는 '희미한'이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희미한은 내 DNA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셔도 희미했고
빨랫줄에 널린 색 바랜 팬티처럼
모든 약속도 희미했다
11월 봉숭아 물든 손톱처럼
누가 욕을 해도 희미했고 누가 돈을 떼먹어도 희미했다
색을 잃어버린 백일홍 꽃잎처럼

아버지 때문에 슬플 일은 없을 것이다
희미한 아버지

희미한 유전자 덕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나도
사람들은 저녁연기처럼 기억하지 못할까

그러나 너무나 희미해서
또렷한 아버지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판

 

 

 

 

 

 

아버지의 한 연구 3 - 정진혁


안방은 기울기가 심했다 10도쯤 아랫목 쪽으로 경사가 졌고 구슬을 놔두면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알 수 없는 곳으로 밤마다 굴러가는 꿈을 꾼다며 엄마는 지긋지긋해했다 아버지는 잘 참았다 나는 기울기가 더 컸으면 미끄럼을 탈 수 있었는데 늘 아쉬워했다 겨울이면 살얼음이 낀 밥상에서 그릇들은 흘렀고 그때마다 우리는 그릇을 붙잡고 밥을 먹었다 그 많은 시간과 기울기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참아 내고 있었다 콩을 골라내는 일은 모서리에서 일어나는 우리 집의 즐거움이었다 동글동글 예쁜 콩만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공기의 흐름을 방해하며 집을 지어 여름에는 무덥고 물의 흐름을 방해해 악취와 물 부족을 즐겼다 케비넷 속에 넣어 둘 돈은 없었으니 오히려 돈의 흐름은 원활했고 우리는 간신히 먹고살았다 아버지는 기울어진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면 피의 흐름이 원활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몸에서도 흐름이 막히면 질병이 생긴다고 말하지만 숨 쉬는 일조차도 기울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흐름을 신봉했고 흘러야 새로워진다고 입에 달고 다녔다 가족들의 마음은 다양한 생각이 늘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정작 아버지는 한 생각에 집착했다 그러나 잠을 잘 잤다 흐름은 결국 평평하게 되려는 것 기울기 속에서 우리는 평평해지려고 흐르면서 밥을 먹었고 평평해지려고 흐르면서 잠을 잤다 아버지는 방바닥의 기울기를 즐기며 내년에는 더 각을 크게 해야 평평해진다고 말했다 그 흐름으로 인해서 높은 곳에서는 낮은 곳으로 많은 곳에서는 없는 곳으로 계속 흐르고 흘러 결국은 다 평행을 유지한다고 연구에 박차를 가했지만 우리는 기울어져 잠을 설쳤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자꾸 기울어져 갔다


 

 

*시인의 말

나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다
꽃잎 떨어지는 막막함 안에 서서
나를 증명한다
너의 등 뒤에서 숨소리를 듣는다
항상 떠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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