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 정창권

마루안 2020. 6. 2. 18:45

 

 

 

아주 시적인 제목을 달고 나온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는 추사 김정희 선생 가족의 한글 편지를 분석한 책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의 이름을 들었다. 추사체라는 유명한 글씨체로 귀양살이를 했던 학자 정도로 배웠다.

국보로 지정 되어 있는 그림 <세한도>에서 김정희의 진면목을 볼 수도 있겠다. 많은 시인들의 시적 연구에도 인용되고 있는 그림이다. 그 단순한 그림에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조선조 학자이기에 한문이 주된 글씨였겠지만 선생은 한글 문장도 남겼다.

이 책에서 다룬 그의 친필 언간(諺簡>이다. 언문으로 된 편지라는 뜻으로 당시 사대부들은 한글을 아녀자들이나 익히는 글자라고 무시했다. 책에서는 추사의 편지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 편지를 두루 소개한다. 아버지 김노경, 아내, 며느리 등이다.

당대의 명문 집안답게 여자들도 문자를 익혔고 그 집안 남자들은 여자라고 차별하지 않고 무척 공대했다. 가문이란 저절로 뼈대가 생기는 게 아니다. 추사는 아들이 없는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양이 되었으나 친아버지와 유대는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아버지 김노경의 아내는 김정희, 김명희, 김상희 등 아들 셋을 낳고 서른 다섯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많은 부분을 아들과 며느리에게 의지한다. 김노경 또한 교양인으로 아내와 가족을 무척 공대했다. 이 책에서 소개한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추사 같은 학자가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아버지도 추사처럼 유배를 갔는데 유배지 고금도에서 추사와 며느리인 예안이씨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책에 실린 편지를 보면 읽기가 무척 힘들다. 고어에다 띄어쓰기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흘림체의 붓글씨니 천상 학자들의 번역이 필요하다. 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나 해독 불가능한 글자도 있다. 이 책에도 그 부분을 OO으로 표시하고 있다. 불과 200년 전의 편지인데 나는 번역 없는 원문을 읽을 수 없다.

추사는 3명의 아내를 뒀다. 첫째 아내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결혼 몇 년 후에 병으로 사망한다. 둘째 부인 또한 자식을 낳지 못해 소실을 얻어 1남 2녀를 둔다. 서얼 차별이 심했던 당시 추사는 그 자식들을 차별 없이 무척 사랑했다.

이 책의 후반부는 추사가 둘째 부인 예안이씨와 며느리(양자 김상무의 처) 풍천임씨에게 보낸 편지가 주를 이룬다. 추사는 55세 때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데 유배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유리안치형 유배를 당한다.

9년 간의 유배 생활 중에 추사는 갖은 병치레를 하면서도 집안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낸다. 유배 중에 추사는 김상무를 양자로 들인다. 아들이 있으나 서자였기에 제사를 모시는 아들 대를 잇기 위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추사는 아들보다는 아내 예안이씨와 며느리 풍천임씨에게 편지를 보낸다. 추사는 제주 유배 중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데 아내가 죽은 지 한 달 뒤에야 부고를 받는다. 추사는 난데없는 소식에 망연자실한다. 

비록 자식을 낳지 못한 아내지만 30년 동안 함께 한 아내다. 실제 추사는 편지에도 아내에게 극존칭을 쓰며 공대했다. 유배 중에 아내가 보낸 음식과 의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던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도망시(悼亡詩)를 쓴다.

누가 월하노인께 호소하여
내세에는 부부가 서로 바꿔 태어나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나의 이 슬픈 마음을 그대도 알게 했으면.

아내를 향한 사랑이 묻어나는 절절한 문장이다. 가부장 제도 아래 이런 애틋한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추사는 멋진 남자다. 남녀의 인연을 주관하는 월하노인이라고 정해진 이별을 어찌 막을 것인가. 지은이 정창권 선생 덕에 좋은 책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