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너의 상주가 되어 - 문동만

마루안 2020. 3. 23. 21:29



나는 너의 상주가 되어 - 문동만



어떤 자세로 죽을 것인가 고심한 사람 같았다
부목도 없이 절뚝이며 진눈깨비 속을 걷던 너는
새순 같던 혀를 말아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누구도 쓰러진 너를 진맥하거나
푸르뎅뎅한 눈꺼풀을 열어보지 않았다
각각의 깊은 호리병 속으로 부리를 들이대느라
잠긴 눈을 놓치고 갔다


어떤 말을 하고 사라질까 고심한 사람 같았다
꼿꼿한 모가지를 가까스로 꺾어
제 가슴에 품어가던 역사를
자유보다도 궁상에 살아지는 날개를
높게도 길게도 날지 못하고
안으로만 쪼그라드는 날개들의 역사를


흉부과 허기진 바닥을 쪼아대던
뭉특한 부리는 누진 깃털에 고이 잠들었다
삼월의 늦은 눈이 푸른 눈꺼풀을 덮었다
나는 너의 상주가 되어 너를 끝마치었다



*시집, 구르는 잠, 반걸음








빈방 - 문동만



남긴 말이 없었으므로
빈방에 찍힌 죄 없는 지문들을 더듬었다
단정한 사물들이 유통기한이 많이 남은 우유곽이
어제까지의 숨이었는데
나는 늪의 세입자인 양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밥 먹었느냐는 인사말을 좋아했던
순한 목소리만 굵은 먼지처럼 흘러 다녔다
부동산 주인은 문을 닫아주었다
이 짐을 어디론가 부쳐야 하는데
천국도 연옥도 주소가 없었다
월세만 내다 갔으니 그 세상은 융단 깔린 방이 많을 것이다
흔한 불행의 서사는 출판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너를 말해줄 문장이 많은데도
너는 책 한 권이 되지 못했다
너를 보내려고 창을 열었다
너는 오래도록 머뭇거리다 우리가
가는 걸 보고서야 철길 쪽으로 빠져나갔다
엄마한테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며 웃으며 달려갔다
청량한 바람만이 너를 누일 것이다
인연의 무거움이야 실낱같다고
보일러 꺼진 방바닥에
물을 그어 쓴 편지를 읽었을 테지
삼월이었으니 제비꽃 피는 꽃길이었을 테지
너는 총량이 없는 저수조에 담겨 있었다
몇 년이고 졸졸 콸콸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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