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행성의 새벽 - 윤의섭

마루안 2020. 3. 22. 18:53



행성의 새벽 - 윤의섭



잠이 들고 다시 이 마을이다

이정표는 올 때마다 바뀌었지만 늘 같은 길이다

지형이 낯설지 않으니 죽어 나간 자들이 머무는 곳이거나

한 번쯤 거쳐 온 여로였거나

생시에서는 미아의 마을이라 이름 지었다


태양 같은 별 주위를 맴도는 천체가 행성이다 벗어나지 못하고

지난 계절 밟았던 길을 한없이 되짚는 불문율

이 행성에선 누구나 삼십 킬로미터로 달린다

멀어져 간 날들과 다가오는 생애를 완상하기에 좋은 속도


끝내 마을을 헤어나진 못한다

노부부가 저녁밥을 지어 주느라 관솔에서는 구름처럼 연기가 피어난다

저 능선만 넘으면 도회지라며 웃어 보이는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흐르지 않는 개울 짖지 않는 개 내려앉지 않는 새 활짝 핀 수국 아래 쌓인 눈

문득 이정표가 다시 쓰이고 있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새벽노을 같았다

날이 새면 어김없이 나타나지만 이내 감겨 버리는 능선 위의 눈동자

좀 전까지도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으니 죽은 듯이 살아 있거나

내가 이 행성에 남겨진 것이거나

새벽에는 꼭 관솔 피우는 냄새가 풍겼다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사라진 편지 - 윤의섭



보냈는데 못 받았다 하고 반송되지도 않은 편지

등기로 보낸 게 아니어서 우체국에서도 알 수 없다는

그리 대단치도 않은 실종 사건이겠지만

발생 경위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추리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편지는 보낸 곳과 받는 곳 사이에 있다


인간계를 봐도

사멸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움이 덜하여 잊었더라도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생존에는 막연한 기대와 무지가 필요하다


그러니 덜 아는 자여야 한다

봄이 되어 꽃피지 않는 나무가 있어도 무심히 지나쳐주고

어제까지 보이던 별이 보이지 않아도 소문내지 말고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는 사람이라도 평생을 기다려야 한다


편지는 지금 너와 나 사이에서 기약 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길에서 길로 휴지통에서 쓰레기장으로

살아남는다면

행성과 행성을 넘나들고 삼생을 돌아갈 것이다

안부와 소식과 정념이 사라지기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시인의 말


여전히 헤매고 있으므로

이제 조금 다가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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