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미각 - 박춘희

마루안 2019. 11. 15. 19:45



바람의 미각 - 박춘희



'달콤하다'는 극에 달한 죽음의 미각이다.

홍시처럼 모든 썩어 가는 것들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이따금 음흉하게 문드러지고 있었던 할머니의 붉은 잇몸과 어머니의 보드라운 종아리, 단단한 근육들은 서서히 풀려 대지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미각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소태처럼 쓴 혀로 흙벽을 핥아 보았다.

그해 된장독이 끓어올라 장맛이 넘어갔다.


어느 날 어머니는 더 이상 비린 찬을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물을 떠나온 생선의 비린내와 어머니의 살냄새는 녹내장을 풍기며 공기 중에 흘러넘쳤다.


노년의 어머닌, 모든 미각을 잃고 백지로 돌아갔다.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출판그룹 파란








저녁의 이사 - 박춘희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생의 바깥


마른 다리를 핥던 고양이 울음

시장기로 풀이 죽는데

날은 저물고


이삿짐을 싸다 말고

꽃을 캔다.


파산을 하고 소식 끊은 딸이 하마나 올까

삽짝이 기울도록 기다리시던 어머니 곁에

토종 국화꽃


흙을 거머쥔 잔발을 떼어 놓는데

반쯤 뭉개진 햇빛들

손 하나 더 얹어 간다.


붉어지다 붉어지다 입술이 터진 꽃

마침내 검붉은 잇몸으로 물크러질 때까지

우리는 비바람을 맞으며 그 저녁을 건너왔다.


옴팡한 꽃자리를 들출 때마다 축축하게 돌아눕던 가족들

시큰거리는 무릎을 세워 빈 젖을 물리고

여기까지 왔다.


열렬한 맘도 없이 꽃 몸살 앓던 그 밤

꼬약 한입 베어 물고 나 함께 물크러졌던가?


시큼한 저녁의 바깥

꽃가족


토종 국화 맷방석만 한 저녁상을 차리고


우린

또다시

그 저녁을 건너갔다.



*'삽짝'은 '사립문', '꼬약'은 '오얏'의 경상도 방언.






# 박춘희 시인은 1957년 경상북도 봉화 출생으로 한경대학교 및 동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시와 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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