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에게 가는 길 - 박서영

마루안 2019. 11. 11. 19:17



너에게 가는 길 - 박서영

-무덤 박물관에서



살아가는 일이 화살표 하나를 따라가는 것이어서

매표소에 들러 표 한 장을 끊고

새의 주중이 같은 화살표를 따라 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무덤에는 길을 가르쳐 주는 안내인이 있고

입구와 출구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다

적어도 나는 행방불명 따윈 되지 않을 것이다

안심이 된다


너에게 가는 모든 길은 화살표와 연결되어 있다

전봇대에 납작 붙어 있는

흰 종이 위의 화살표를 따라

너를 만나러 간 적도 있고

병원 영안실의 화살표를 따라

너를 찾으러 간 적도 있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아 좋다


어떨 땐 그렇게

단순 명료한 대답에 도달해서

입구와 출구를 번갈아 보며

나는 퇴화된 인간처럼 순진해진다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시작








무덤 밖의 지도 - 박서영

-무덤 박물관에서



사방이 탁 트여서 사방이 막힌 곳

입구와 출구를 이야기할 때

당신은 얼마나 막막한가

길 한 가운데 서서 눈앞이 캄캄해질 때


이 세상의 지도는 나를 그대에게

데려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도 속의 길을 따라가면 갈수록

그대에게 가는 길이 더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길을 잃고 헤매야

길의 껍질을 벗겨낼 수 있는 것이다

저녁 무렵 낯선 길에 서서

그대를 발견하고 그대의 맨살을 만지고

정신이 번쩍 들어 그대를 떠나오면서

비로소 삶의 지도에 핏줄을 그려 넣게 된다

이글대는 핏즐의 길을


사방이 탁 트여서 사방이 막힌

이곳에서의 사랑은 가느다란 여귀풀이다

그러고도 또 얼마나 뻗어나가

세상을 뒤덮을 것인가

여귀풀의 놀라운 번식력이 길을 뒤덮고

지도의 내장 속으로 나는 걸어가

지도의 내장 밖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안과 밖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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