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곁의 먼 곳 - 전동균

마루안 2019. 11. 8. 19:23



내 곁의 먼 곳 - 전동균



잎 진 큰 나무 아래서 비를 맞는 건
즐거운 일


툭 툭 갈라지는 나무껍질을 쓰다듬으며
나는 중얼거리네
내 입술과 귀를 불태우는 그 말에게
묻고 대답하고
침묵하면서


먼 곳으로 가네, 새살처럼 돋아나는
통증을 안고


떠나는 것들, 돌아오는 것들의 발소리 분주한
이 저녁 속의
다른 저녁에게로


젖은 몸으로
허공과 싸우듯 허공을 껴안는
나뭇가지의 투명한 불꽃들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무엇으로든 빚어질 수 있어요 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


견딜 수 없는 사랑을 부르는
빗방울, 빗방울들
떨림으로 가득 찬 나의 눈동자들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창비








이번엔 뒷문으로 - 전동균



두달 만에 면회를 갔지요
연분홍 꽃무늬 새 옷 입혀드리자
좋아라, 콧노래 흥얼대는 어머니


갑자기 집에 가자 그러시네요
식구들 기다린다고
아버지 좋아하는 가자미조림 해야 한다고


어쩌나, 아버지는 벌써 돌아가셨는데
집은 십년 전에 도망갔는데


공원 나무 그늘에서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 친척들이며
달이 솟는 우물들이며
모여서 활짝 피는 수국꽃 얘기로
서너시간


무언가 내 옆을 자꾸 지나갔어요
이름을 부르면 어머니도 나도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짐승 그림자가
들끓는 물결들이


어둑해지는 저녁에 병원으로 돌아왔지요
이번엔 뒷문으로 왔지요
세상에 제일 좋은 집이 여기예요, 어머니
아시는 듯 모르시는 듯
내 손만 꼬옥 잡고 아장아장
잘도 따라오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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