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랑 가수 - 전윤호

마루안 2019. 10. 7. 21:35



유랑 가수 - 전윤호



태백산맥 한가운데 우리 동네는
군청도 있고 읍사무소도 있지만
없는 게 더 많았네


안경이 깨져도 원주로 가야 하고
티비씨가 안 나와 요괴인간도 못 봤지
검열받던 신문마저 어제 뉴스가 배달되었어


갓 졸업한 선생들은 다음 날이면 달아나
미술 선생이 한문을 가르치고
음악 선생은 슬리퍼로 뺨이나 때렸지


기타 배울 데 없는 내 꿈은
대학가요제 출전이었고
온순한 소녀들은 화가가 희망이었네


석탄 싣고 나가는 화물 열차처럼
검은 시간은 소리나 질러대고
갱도가 무너지면 여자들이 울었지


그림 그리고픈 소녀는 아줌마가 되고
로커가 되고팠던 나는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어두운 골목을 보네


저기 초등학교 은행나무 아래
기타 딩딩 노래 한 곡조 풀면
박수나 한번 쳐줄 텐가


특활 시간 포크 댄스 추던 손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백동전 한 닢 던져주련가


기차는 늦은 밤 떠나고
노을은 남산에 걸려 피 흘리는데
아무도 발을 멈추지 않네



*전윤호 시집, 정선, 달아실출판사








가을비 - 전윤호



우리가 이 생에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는 비가 오고 강물이 흐르니
살아 있는 것들은
훌렁훌렁 떠내려가
늙은 술집 다리에 걸리지 않겠나


안개가 산 아래 내려와
너 없는 문 두드리면
넘어진 거울만 남은 방에는
어둠이 무릎장단으로 아라리 한 수 뽑네


우리가 이 생애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뿌리 없는 것들 모여드는 바다가 결국은 있어
단풍 지고 눈 내릴 때
나이만 먹은 설움으로
돛대도 없이
가라앉은 나룻배 되어 기다리고 있지 않겠나






# 전윤호 시인은 1964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 소설>, <늦은 인사>, <천사들의 나라>, <봄날의 서재>, <세상의 모든 연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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