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가을 초저녁 초승달 아래 - 윤병무

마루안 2019. 9. 21. 22:17



초가을 초저녁 초승달 아래 - 윤병무



잎이 나무를 놓는다
어쩌다 생겨 시간을 놓는다
먼저 놓아 흔드는 손
떠나며 절교한다


작별을 마중한다
작별의 시간을 바람이 운다
울 일은 작별이고
작별은 시간에 있지만


사이를 바람이 분다
사주와 팔자를 풀듯
초가을 초저녁 초승달을 데려온다
이미 마른 잎을 내려놓는다


초가을이니 돌이킬 순 없지만
초저녁이니 기다린다
초승달이니 환해지겠지만
천운(天雲)이 가려버렸다니


당신과 나는 바람을 부릴 줄 몰라
당신 먼저 졌다
당신을 보며 시간을 울었다
초가을 초저녁 초승달 아래서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문학과지성








당신과 나의 학이편 - 윤병무



나의 옛날을 사는 당신과
당신의 훗날을 사는 내가
외따로인 것은 별빛처럼
빛이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아서이지


빛은 열에서 태어나지만
빛 없는 열은 당신이고
열 없는 빛은 나이니까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안녕의 시절은 시간이었지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였지
빛이 열의 손을 놓았던 때는 시각이었지
때를 새긴 어느 한순간이었지
시간의 변주가 시작된 때였지


흩어졌지 오래도록 재편되지 않아
옛날이 훗날로 이행하는 중이었지
어둠을 길 삼아 고독한 길을 갔지
길은 고독을 배웠고 고독은 길을 익혔지
배우고 익혀도 기쁨은 따라오지 않았지


훗날을 사는 내가 멀리서 찾아갔지
옛날을 사는 당신이 찾아오지 않아
내가 당신을 찾아갔지
훗날이 옛날을 즐거워했지만
내가 당신을 즐거워할 뿐이었지


나를 사는 당신을 알아주지 않고
당신을 사는 나를 알아주었지
당신이 섭섭해하지 않아도 여전히
빛은 닿아도 열은 닿지 않았지
몰라주는 달빛이 그저 서운했지






# 윤병무 시인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했다.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5분의 추억>, <고단>,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