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줄 哀

하마터면 더 열심히 시를 읽을 뻔했다.

마루안 2019. 6. 23. 22:00

 

오래전에 어느 시인이 하는 강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두 시간 가까이 그 시인은 참 열심히 강의를 했다.

 

강의 마지막에 질문 있으면 하라고 했다.

30명 가까운 사람이 전부 조용하다.

 

진행을 맡았던 주최 관계자가 어떤 질문도 괜찮다고 거들었다.

그래도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민망함에 서둘러 시인이 나서 진화를 하고 강의를 마무리했다.

자기 시가 너무 좋아서 모두 할 말을 잃은 것이라고 조크를 했다.

 

지금 같으면 그 어색한 침묵이 싫어 나라도 나섰을 것이다.

그때는 시도 잘 몰랐지만 말주변도 참 없었다.

 

시인이든 작가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때 절망스러울 것이다.

시만 쓰느라 사회 적응을 못했고 숫기가 없어서 끼리끼리 모이는 곳에 잘 가지 않는다 치자.

 

가족끼리 돌려 보고도 모두 꿀 먹은 벙어리다.

시집 나오자마자 나눠 준 지인들도 읽었는지 어쨌는지 아무 반응이 없다.

 

다행히 꼼꼼한 독자가 있어 시를 읽고 어떤 단어 하나가 이해되지 않는다.

오타인지, 의도된 어휘인지 딱 그 단어 하나가 걸린다.

 

난생 처음 출판사에 연락해 사연을 말하니 시인의 연락처를 알려준다.

"요즘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시를 읽는 독자가 있네요."

목소리에서 시인 느낌이 물씬 나는 그 직원은 통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거나 혹 당황할까봐 먼저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답이 왔고 그가 알려준 통화 가능 시간에 전화를 했다.

 

일면식도 없는 시인과 통화를 하고 이메일 주소를 알아 낸다.

말보다 글로 질문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답이 없다.

잘못 배달 되었나?

나중 수신 확인을 하니 보낸 지 1시간 후쯤 읽은 걸로 나온다. 

 

나 같으면 며칠 후에라도 이런 답을 줄 것이다.

"당신의 질문이 유치해서 답변 가치가 없습니다. 구체적 답변은 하지 않겠습니다."

 

얼마나 정직한 답장인가.

공연한 짓을 했어, 이런 시인에게는 무반응이 형벌인 것을,,

내가 너무 진지하게 시를 읽었나?

 

단어가 걸리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대충 넘어 갔으면 좋았었나?

다만 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한 자 한 자 필사해 올린 그의 시를 찾아서 모두 지웠다.

예의 없는 시인에 대한 독자의 복수다.

 

망설이긴 했어도 시인에게 질문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하마터면 그의 시를 더 열심히 읽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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