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운명 - 백무산

마루안 2019. 5. 27. 19:40



운명 - 백무산



눈이 오다 비가 내린다

비가 오다 눈이 내린다


젖은 어깨 뼛속이 시리다

부은 발이 신발 속에서 질벅거린다


눈보라 속에 길이 드러났다 감춘다

이런 날 아니고서야 어찌 길을 나서랴


그 많던 젊은 날들

하루도 나의 날은 없었다

그 숱하던 봄날

하루나 나의 날이 없었다


길에 패인 웅덩이에 하늘이 비친다

물 위에 부는 바람에 뼈가 시리다


비가 오다 눈이 내린다

이제 눈앞에 드러나는 길 하나

그 길엔 이미 끊어진 벼랑이 보인다

눈이 내리다 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돌아 나오는 길

그 길로 나는 간다



*시집, 길 밖의 길, 도서출판 갈무리








그 시절 보리밭에서 - 백무산



긴 보리밭을 몇 개나 지나야 교문이 보였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 우리는 보리밭을 더듬곤 했다

어미 종달새가 하늘 한 점 보일 듯 말 듯한

허공에 멈추어 어질어질하도록 울어대는

그 곳에서 정확히 수직으로 떨어지는 지점에

둥지를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 연둣빛 보리 이삭 우묵한 이랑 사이에

햇살을 쪼며 콩닥거리는 차돌 빛 알 두 개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내 심장소리를

내가 처음 들었다


바다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무한정의 세계가 현실이 아니었듯이

새의 둥지는 한없이 단순하고

지극히 연약하여 그건 실재가 아니라

물무늬 잔상인 양 어른거리기만 하였던 것일까

그 그림자 같은 그것에 손을 내밀다가 그만

너무도 허망하게 깨뜨려 엎질러버렸을 때

처음 수음을 하고 나서 밀려드는

그 미끈하고 비릿한 슬픔과 연민 같은 것

그것은 처음 내가 나를 돌아보는 아픔이었다면

내가 엎질러버린 그 비릿함은 처음 세상을 향한

슬픔과 연민에 하늘 가득 질펀한 글썽임이었다

아무래도 그 죄를 내가 다 받아 나도 모르게

아직도 까마득한 마음 한 점에서

나는 울먹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