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 백무산
눈이 오다 비가 내린다
비가 오다 눈이 내린다
젖은 어깨 뼛속이 시리다
부은 발이 신발 속에서 질벅거린다
눈보라 속에 길이 드러났다 감춘다
이런 날 아니고서야 어찌 길을 나서랴
그 많던 젊은 날들
하루도 나의 날은 없었다
그 숱하던 봄날
하루나 나의 날이 없었다
길에 패인 웅덩이에 하늘이 비친다
물 위에 부는 바람에 뼈가 시리다
비가 오다 눈이 내린다
이제 눈앞에 드러나는 길 하나
그 길엔 이미 끊어진 벼랑이 보인다
눈이 내리다 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돌아 나오는 길
그 길로 나는 간다
*시집, 길 밖의 길, 도서출판 갈무리
그 시절 보리밭에서 - 백무산
긴 보리밭을 몇 개나 지나야 교문이 보였지만
그곳으로 가지 않고 우리는 보리밭을 더듬곤 했다
어미 종달새가 하늘 한 점 보일 듯 말 듯한
허공에 멈추어 어질어질하도록 울어대는
그 곳에서 정확히 수직으로 떨어지는 지점에
둥지를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 연둣빛 보리 이삭 우묵한 이랑 사이에
햇살을 쪼며 콩닥거리는 차돌 빛 알 두 개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내 심장소리를
내가 처음 들었다
바다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무한정의 세계가 현실이 아니었듯이
새의 둥지는 한없이 단순하고
지극히 연약하여 그건 실재가 아니라
물무늬 잔상인 양 어른거리기만 하였던 것일까
그 그림자 같은 그것에 손을 내밀다가 그만
너무도 허망하게 깨뜨려 엎질러버렸을 때
처음 수음을 하고 나서 밀려드는
그 미끈하고 비릿한 슬픔과 연민 같은 것
그것은 처음 내가 나를 돌아보는 아픔이었다면
내가 엎질러버린 그 비릿함은 처음 세상을 향한
슬픔과 연민에 하늘 가득 질펀한 글썽임이었다
아무래도 그 죄를 내가 다 받아 나도 모르게
아직도 까마득한 마음 한 점에서
나는 울먹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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