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살을 벗기며 - 김이하
왠지 삶이 무겁다고
새에게 말했을 때
새는 저 혼자 날아갔다
그리고 쓸쓸한 밤과 겨울
나는 부르튼 발을 끌고
가까스로 방에 몸을 들였으나
더욱 막막한 추위가
온몸을 흔들었다
좀체 들 수 없는 눅눅한 잠
뜬눈으로 새벽이 왔겠다
아아, 가려운 저 발바닥을
그곳 두텁게 들어앉은 더께를
뭉텅 벗겨 내고
그래도 왠지 삶이 무겁다고
발에게 말했을 때
발은 비로소, 내가 무거운 까닭이라고
못생긴 웃음을 주었다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화
저쪽에서 이쪽으로 - 김이하
새들.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다
내 눈길에 막혀
나뭇가지 밑으로 사라진다
새를 잃은 나뭇가지는
지난해 못다 떨군 잎자루를 서둘러 털어낸다
다시 시치미를 떼는 가지들
아마 꽃을 보았을까
홍매, 청매, 산수유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오랑캐꽃 몇은 하룻강아지 눈이다
무겁게 얹히는 바람은
새인 양 꽃가지 위로 몸을 민다
봄이라고, 한 가지 피운 꽃 보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길
목련도 나무 한 가득 제비 주둥이를 내민다
별일 없다, 누군가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린다
이 봄 별일 없다
저 방에서 이 방으로 건너오는 동안
어지럽게 널브러진 세간들
전깃줄 한 뭉텅이 속에 매달린 충전기, 전기 포트, 진공청소기, 컴퓨터 따위
고장 없는 삶을 보여 주는 동안
나도 별일 없을 뿐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다 들킨
새들처럼 문지방을 넘다
엎어진다, 고장난 몸 하나
봄이라고 꽃바람 마시다 열꽃 핀 몸 하나
이쪽에서 저쪽을 못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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