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굳은살을 벗기며 - 김이하

마루안 2019. 4. 5. 19:50

 

 

굳은살을 벗기며 - 김이하

 

 

왠지 삶이 무겁다고

새에게 말했을 때

새는 저 혼자 날아갔다

 

그리고 쓸쓸한 밤과 겨울

나는 부르튼 발을 끌고

가까스로 방에 몸을 들였으나

더욱 막막한 추위가

온몸을 흔들었다

 

좀체 들 수 없는 눅눅한 잠

뜬눈으로 새벽이 왔겠다

아아, 가려운 저 발바닥을

그곳 두텁게 들어앉은 더께를

뭉텅 벗겨 내고

 

그래도 왠지 삶이 무겁다고

발에게 말했을 때

발은 비로소, 내가 무거운 까닭이라고

못생긴 웃음을 주었다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화

 

 

 

 

 

 

저쪽에서 이쪽으로 - 김이하

 

 

새들.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다

내 눈길에 막혀

나뭇가지 밑으로 사라진다

 

새를 잃은 나뭇가지는

지난해 못다 떨군 잎자루를 서둘러 털어낸다

다시 시치미를 떼는 가지들

아마 꽃을 보았을까

 

홍매, 청매, 산수유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오랑캐꽃 몇은 하룻강아지 눈이다

무겁게 얹히는 바람은

새인 양 꽃가지 위로 몸을 민다

 

봄이라고, 한 가지 피운 꽃 보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길

목련도 나무 한 가득 제비 주둥이를 내민다

별일 없다, 누군가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린다

이 봄 별일 없다

 

저 방에서 이 방으로 건너오는 동안

어지럽게 널브러진 세간들

전깃줄 한 뭉텅이 속에 매달린 충전기, 전기 포트, 진공청소기, 컴퓨터 따위

고장 없는 삶을 보여 주는 동안

나도 별일 없을 뿐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다 들킨

새들처럼 문지방을 넘다

엎어진다, 고장난 몸 하나

봄이라고 꽃바람 마시다 열꽃 핀 몸 하나

이쪽에서 저쪽을 못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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