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에 처음인 듯 봄이 - 조용미

마루안 2019. 4. 6. 18:31



생에 처음인 듯 봄이 - 조용미



현통사 앞 물가의 귀룽나무는 흰 꽃을
새털구름처럼 달고 나타났지
귀룽나무, 나는 놀라 아 귀룽나무 하고
비누방울이 터지듯 불러보았지


귀룽나무, 너무 일찍 꽃 피운 귀룽나무
귀룽나무 물가에 가지를 드리우고
바람결에 주렁주렁 흰 꽃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네


귀룽나무 새초록 가지마다
연둣빛 바람이 샘솟네
개울물 소리 따라 늘어진 가지의 흰 꽃망울들이
조롱조롱 깨어나네


저 귀룽나무 흰 꽃들 받아먹는
물소리 따라 봄날은 살며시 가는 거지 또 그렇게
가는 거지 건듯건듯 봄날은 가고


귀룽나무 아래 어루만졌던 어떤 마음도
드문드문 아물어가는 거지
누군가 한 세월 서러이 잊히는 거지


아 그리고 생에 처음인 듯
문득 봄이 또 오는 거네
귀룽나무는 물가에서 전생에 피운 적 없는
흰 꽃들을 뭉클뭉클 달고서
나를 맞이하는 거네



*시집, 기억의 행성, 문학과지성








하늘의 무늬 - 조용미



별이 하늘의 무늬라면 꽃과 나무는 땅의 무늬일까요
별이 스러지듯 꽃들도 순식간에 사라지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불멸을 이루나 봅니다
하늘의 무늬 속에 숨어 있는 그 많은 길들을
저 흩어지는 꽃잎들은 알고 있는 듯합니다


이 꽃잎에서 저 꽃잎까지의 거리에 우주가 다 들어있고
저 별빛이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 또한 무한합니다


무한히 큰 공간과 거기 존재하는 천체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인 우주를, 그 우주의 은하에서
나는 누구도 아닌 당신을 만났군요
자기 자신에서 비롯되는 마음처럼, 샘물처럼 당신과 나는
이 우주에서 생겨났군요


우주는 깊고 별들은 낮아
나는 별들의 푹신한 담요에 누워 대기를 호흡해봅니다
천천히, 당신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그러다 나는 밤하늘로 문득 미끄러지듯 뛰어내릴까요
너무 오래 살았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남천에 걸린 남두육성의 국자별자리를 스쳐,
천공의 우주가 겹겹이 내려앉아 우리가 알 수 없는 오래전
어느 시간의 소우주를 보여주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봉황과 학을 타고 하늘을 노닐며 사현금을 뜯는 신선들과
천지 공간을 가득 채운 일월성수의 별자리 따라


나는 당신의 전생으로 갑니다
우리는 어느 별에선가 또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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