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명보험 - 김기택

마루안 2019. 1. 17. 22:47



생명보험 - 김기택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도 높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수상한 제안을 해왔다.


죽음에는 다리들이 참 많이도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다.
저렇게 많은 다리들을 갖고 이제 어쩌자는 것인가.
세상 모든 죽음을 낱낱이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은 아무 대책이 없다.


공짜였던 죽음이 언제부터 선불로 바뀌었나요?
선불이 아니라, 아버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에요.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링이요.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견적 뽑으면 다 나와요.
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
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거예요.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문학과지성








구직 - 김기택



여러 번 잘리는 동안
새 일자리 알아보다 셀 수 없이 떨어지는 동안
이력서와 면접과 눈치로 나이를 먹는 동안
얼굴은 굴욕으로 단단해졌으니
나 이제 지하철에라도 나가 푼돈 좀 거둬보겠네
카세트 찬송가 앞세운 썬그라스로 눈을 가리지 않아도
잘린 다리를 고무타이어로 시커멓게 씌우지 않아도
내 치욕은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네
한 자루 사면 열 가지 덤을 끼워준다는 볼펜
너무 질겨 펑크 안 난다는 스타킹
아무리 씹어도 단물 안 빠진다는 껌이나 팔아보겠네
팔다가 팔다가 안 되면 미련 없이 걷어치우고
잠시 빌린 몸통을 저금통처럼 째고 동전 받으러 다니겠네
껌팔이나 구걸이 직업이 된다 한들
어떤 치욕이 이 단단한 갑각을 뚫겠는가
조금만 익숙해지면 지하철도 목욕탕 같아서
남들 앞에서 다 벗고 다녀도 다 입은 것 같을 것이네
갈비뼈가 무늬목처럼 선명하고
아랫도리가 징처럼 울면서 덜렁거리는
이 치욕을 자네도 한번 입어보게
잘 맞지 않으면 팔목과 발목 좀 잘라내면 될 거야
아무려면 다 벗은 것보다 못 하기야 하겠는가
요즘엔 성형외과라는 수선집이 있어서
몸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척척 깎아주는 세상 아닌가
옷이 안 맞는다고 자살하는 것보단 백번 나을 거야
다만 불을 조심하게나
왜 느닷없이 울컥 치밀어 나오는 불덩이 있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건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태우고 보는 불,
시너 한 통 라이터 하나로
600년 남대문을 하룻저녁에 태워먹은 그 불 말이야
불에 덴 저 조개들 좀 보게
아무리 단단한 갑각으로 온몸을 껴입고 있어도
뜨거우니 저절로 쩍쩍 벌어지지 않는가
발기된 젓가락과 이빨이 외서 함부로 속살을 건드려도
강제로 벗겨진 팬티처럼 다소곳하지 않은가
앞으로 쓸 곳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자리에 괴로움을 너무 많이 쓰지는 말게
치욕이야말로 절대로 잘리지 않는 안전한 자리라네






# 김기택 시인은 1957년 안양 출생으로 1989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 <바늘 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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