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모 - 이오우

마루안 2019. 1. 18. 21:16



쓸모 - 이오우



쇠막대기 하나
허술한 콘크리트 담장을
버티고 있다.


세월의 혓바닥이 가끔
핥고 지나가는 골목 끝
주인 떠난 집을
혼자 남아 지킨다.


백전노장의 고집처럼
붉은 녹의 갑옷에
철사로 동여맨 허리


담장이 헐릴 그날까지
박힌 그 자리
멈춘 모양 그대로
미라처럼 폐가를 지키는
스핑크스


비가 오면 붉은 눈물 흘리며
눈이 오면 하얀 척추 하나로
시간의 침묵과 싸우며
공허를 지키는
속 깊은 충성


쓸모를 다할 때
어떤 훈장이 달릴까
어느 박물관에 안장될까



*시집, 어둠을 켜다, 문학의전당








노숙자 - 이오우



춥다, 바람이 분다
벌써 이렇게 추어지다니 젠장,
노란 닭발 같은 은행잎들 쌓이고
어둠이 정지화면을 만들어 갈 때
그는 불쑥 등장하였다


지하로 숨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순간을 생각하며
추위를 잊자, 두더쥐같이 살아도 그리움은 날로 호화롭다
가슴을 열고 즉석카메라를 누른다.
그리움이 한 장 한 장 찍혀 나온다.


어둠 속에서 깜빡이던 의식이 먼 항해를 시작하고
그의 떨림이 잦아질수록 내 몸은 아래로 떨어지고
계단을 따라 거침없이 오르내리던 시간들도
'지하상가 번영회' 흐린 겨울 속으로 주저앉고
거미줄에 허리가 굽은 가로등 거리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 거지...."






# 이오우 시인은 본명이 이동순이다. 같은 이름의 원로 시인이 있어서였던지 아님 알맞은 필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충남 홍성 출생으로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시와창작>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둠을 켜다>가 첫 시집이다. 현재 아산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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