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 심재휘
시골 버스 정류장 앞에는 볕 잘 드는
국숫집이 있어서 창가 나무탁자에 앉아서도
먼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저들은 오늘 버스를 놓친 것일까
정류장이 둘만의 오래된 끼니인 듯
늙은 엄마와 다 큰 아들이 국수를 시켜놓고
까마득한 행선지 하나를 시켜놓고
국수가 나와도 탁자를 박자껏 두드리기만 하는 아들의
중증 독방을 앓는 손가락에는 먼 길이 숨어 있어서
몸이 굵은 아들에게 면 가락을 물려주는 엄마의 젓가락에는
먼 길이 숨어 있어서
떠나간 버스가 아직도 흙먼지를 날리는
국수집 창가 자리에는
비가 오지 않아도 젖은 길이 있다
놓친 버스를 잡으려 장화 신고 걸어온 세월의 옆얼굴들을
말없이 어루만지는 봄볕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려다
접어 넣은 먼 길까지 와락 쏟아져나온다
동서남북이 다 닳은 주머니 안으로
구겨진 것들을 도로 집어넣는 엄마
그녀는 결국 숨겨놓은 먼 길을 들키고 만 것인데
다만 오래 걸어가야 하는 것뿐이란다 아들아
먼 길을 가려면 아들아 너도
국수를 잘 먹어야지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산비둘기가 운다 - 심재휘
엄동설한 어둠 속에서 산비둘기가 운다
희미하다
아직은 모두들 잠들어 있는 새벽
고층 아파트 단지의 어느 잎 진 나뭇가지에 서서
산비둘기 한 마리가 욱욱거리고 있다
누구나 살다보면
산을 버린 산비둘기의 내력이 궁금해지는 미명이 있고
조간신문에 실린 왕따 열일곱 살의 유서를 읽으며
산비둘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새벽이 있다
가족들의 방문을 바라보며 서성거리던
불 꺼진 거실의 몇 분이 있었겠다
새벽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아파트 옥상 철문을 마저 열어야 했던
생전의 마지막 몇 걸음이 있었겠다
신문은 그저 신문이려니 하기에는
흐릿하다가 먹먹하다가 산비둘기가 운다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지저귀는 것도 아니고
산비둘기는 그저 울 뿐
어떤 새벽에는 입을 막고 흐느끼기도 한다
# <산비둘기가 운다>와 <먼 길>은 시집 마지막에 실렸다. 두 편의 시는 기존에 발표한 시를 많이 손질해서 어둠의 농도를 조절했다. 요즘 딱 내 마음처럼 둘 다 매우 슬픈 시다. 나는 왜 이렇게 어두운 시에 마음이 오래 가는가. 이것도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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