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검은 백조의 거울 - 조유리

마루안 2019. 1. 15. 21:25



검은 백조의 거울 - 조유리



막이 오르기 전 태어났지
흰 발목에 검은 토슈즈를 신은 낮과 밤
열 발톱 끝에 송곳날을 박자
무도회가 시작되네


어디서 불려 나왔나, 나를 안무하는
춤을 피해 어디로 도망치는 중인가


깃털을 나부껴 바람을 호숫가로 나르며
포물선을 그리는 새의 기낭 속에서
무한히 피었다 파열되는 거울,
뒤꿈치를 든 채 종종걸음치며


나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점프를 하네
거울의 파동에 스텝을 맞추며
거울의 관절로


적막과 소음
두려움과 욕망이
공중에서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네


검은 피아노 건반들 군무가
붉은 파편 속에서 솟구쳐 올라
날개를 스칠 때마다
우아하게 태어나 칠흑 속에 부서질 때


나는 누구의 발톱 끝에 박힌 피멍인가



*시집, 흰 그늘 속 검은 잠, 시산맥사








달빛 보고서 - 조유리



누가 여기 데려다주었는지 모른다
떠나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사람들


의자 몇 구를 서성이는 동안 우리는 문상객이 되었다
병실을 퇴원한 복도들이 사람의 옆구리를 휘어 돌아간다
너무 많은 소용돌이을 감추고 있는


흰 눈썹을 칠한 달빛 속에서
웃다 울다 목이 쉬도록 환호했던 나날
썩은 강줄기를 떠돌던 장미꽃송이들이
검은 벽을 밀려 흘러내린다


지상은 디딜 수 없는 물의 얼룩들로 가득 차서


백골이 다 된 시곗줄 자국만 남겨놓고
손목들이 불빛 환한 지하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신문을 들여다보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안에도
흐린 날은 흐리고 목이 가는 꽃들이 붐빈다


달 속에 들어찬 시간은 희뿌옇게 끓는 열망에 에워싸여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오래전이기도
방금 살아 있던 순간이기도 한





# 조유리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2008년 계간 <문학.선>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흰 그늘 속 검은 잠>이 첫 시집이다. 15회 시산맥상을 수상했다. 등단 10년 만에 나온 시집이 너무나 강렬해서 오래 들여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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