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창백한 표절 - 서규정

마루안 2019. 1. 10. 21:29

 

 

창백한 표절 - 서규정


나의 꿈은, 임대로라도

바다가 보이는 서민 아파트 베란다에

초생달 같은 여자 하나 꽂아두고

쳐다보고 올려보며 손을 흔들다가

그만 고개 부러질 수선화로 피고 싶은 일

살아오면서 살아가면서 제발 네 발 만은 짚지 않기를

세수대야에 이는 손톱에도 날마다 괴로워 했다

닭다리를 씹는 기분으로 걸어가야지

오늘밤도 달이 검은 구름 속으로

발을 든다 뺀다 몸을 와삭 구겨넣는다


*시집, 직녀에게, 빛남출판사

 

 

 

 

 


아아 백도라지 - 서규정


나를 비켜간 모든 것들에 대해서,
노래 하련다 모래와 물이 서로의 힘을 믿고 겉도는
내 고향은 모래나라 물공장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정기적으로 서커스가 들어오고 반사적으로 주먹이 돌지 않음
어지간히 무료해 마지않던 소읍
멀리 주물단지 굴뚝에서 고구마 색깔의 연기라도
울퉁불퉁 솟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 고장에서
조금 더 들어간 대둔산 근처
한적한 산골의 면사무소 직원을 나는 꿈꾸었지

백도라지 같은 아내가 고사리를 등에 업고
퇴근길 동구 밖에서 손을 흔들면 누가 보는가
자전거 페달에 넝쿨째 감겨오는 호박이 주렁주렁
아핫 힘들의 힘! 달이 가꾼 해가 꾸는 꿈 빛나는 꿈
저녁밥줘!
천둥 같은 그 소리가
모기 울음소리로 기어드는 지금 동해남부선을 타고
日光역을 지난다

나를 비켜간 그것들
만경강 하천감시원이라도 할 것을
허파에 바람 들고 젊으나 젊어서 마냥 부푼 꿈
정작 싸워야 할 것은 놓치고 남의 얼굴을 주먹으로 관리하고
가꾸려다 도망쳐 온 수배의 날
경찰은 쌍무지개로 뜬 내 코피에 대해선 한마디 묻지 않고
빠져도 별반 상관없는 호박씨도 아닌 저쪽 이빨에 대해서
묻고 묻고 또 묻고, 날 잡으려면 잡히나
쥐도 새도 모르게 공장에 숨어, 숨어서 쓴 시
전선이 전선으로 이동하는 독재와 민중 민주
파릇한 피의 거대한 담론을 외면하고
십 년을 숨어서 쓴 지하의 시 한 편이 신문에 실리고
시인이 되면서 나는 망했다
세상도 명예도 가꾸지 못한 채 애드벌룬처럼 해는 떠
새날이 왔다
傳貰처럼 세를 든 세날에
사랑도 정의도 칫솔질처럼 자꾸만 나를 비켜가고
아아 도라지 심심산골에 백도라지 전우여
기차바퀴에 깔린 핏빛 노을과 함께 불국사에서
나 오늘은 이렇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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