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왼쪽이다 - 박소원

마루안 2019. 1. 9. 22:21

 

 

나는 왼쪽이다 - 박소원

 

 

어디서부터 내 몸의 오른쪽과 왼쪽이 우회도로를 걷기 시작했을까 어느 날 목 디스크로 인한 근육통이 왼쪽에 마비 증상으로 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늘을 지날 때는 저림 증세가 엄살처럼 더 도졌다


비는 집중적으로 내리다 한순간 눈으로 바뀌었다 나이테를 그리며 백 년 만에 내리는 폭설로 차량 통행이 통제되고 아랫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길이 막혔다 제설 차량끼리 충돌하는 뉴스를 보며 사람들은 외출을 줄였다


기온이 수시로 바뀌고 모든 안부는 한쪽으로 쏠렸다 물리치료실 치료사는 지극한 손길로 전기치료를 완수해 갔으나, 그림자는 균형을 잃었다 예각으로 기운 왼쪽이 늘 앞서서 걷는다


사람들은 왼쪽의 안부로 나의 근황을 물었고 나는 어느새 왼쪽이 되었다 며칠 전 세 번째, 근육통으로 정형외과 병실 침상에 침목처럼 다시 누웠을 때 의사는 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처음으로 오른쪽의 안부를 물었다 나의 반쪽 당신, 거기에 아직도 있는가

 

 

*시집,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 문학의전당

 

 

 

 

 

 

지렁이 - 박소원


몸을 대보면 길마다 온도가 다르다
길은 제 체온으로 구불구불 혹은 직선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구나
무심코 한 응답들이 내 길이구나
장마가 이렇게 쉽게 끝날 줄도 모르고
음습한 흙 속의 길을 서둘러 떠나왔으므로
내가 떠나온 길이 멀리서 더 멀리
멀어져가는 것을
화단의 자귀나무 너머로 뒤돌아볼 뿐,
애초의 제 온도를 잃고
쉽게 몸을 바꾸는 땅 속의 길을
오금이 저리도록 감지하고 있을 뿐,
아무리 뒤돌아보아도
한번 떠나온 길은
내가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다
비가 그치고 달궈지기 시작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방향을 잃고 벌겋게 익고 있는 몸
내 몸이 내 길이다
제 체온을 잃은 징글징글한 몸을
자동차 바퀴에 신음도 없이
터져버린 나의 몸, 반 토막을
햇살이여, 지금도 눈여겨보는가

 

 


# 박소원 시인은 1963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수료했다. 2004년 <문학.선>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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