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저택 - 서윤후
-겨울, 짧고 뜻밖이라는 번외
겨울소묘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망설임을 배웠다
입술에 묻어 있는 말을 곧잘 삼키는 사람과
가슴에서만 목 놓아 우는 사람과
기울어진 목선으로 아득한 장면을 비껴가려는 사람에게서
막 절망이 수포(水疱)를 퍼뜨리고는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유행하는 고요.... 산발하는 침묵....
겨울이 시작되려는 복선으로
집에 가면 그제야 벽에 살며시 기대어
망설임이 늦게 깨우친 말을 들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흉물스러운 것으로 자라나는지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창밖으로 시끄러웠던 바다가 얼마나 잘 노는지를 본다
짧아진 해마저도 다 쓰지 못하고
줄곧 어둠의 비탈길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것들
이름이 없어서 부러운 것들
여름에는 많은 것들이 집 밖으로 나갔다
겨울에는 많은 것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어색하게 통성명하는 이 창백한 저택 거실에는
닫힌 창문이 닫힌 채로 기억하는 셈이 복잡해
잘 열리지 않는 창문들이 있었다
입김으로 적는 말들이
모두 망설였던 적 있는 과거를 그리다가
영영 따뜻함 속으로 소멸해가는 것을 볼 때
내일은 내가 모르는 일로 당황해하고 싶다
모든 것이 창백해지면
곧 모든 것이 거울이 되려고 소리 없이 싸우는
이 헐거운 고요 속에서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엿듣고
그걸 들은 놀란 개처럼 짖고
산짐승처럼 울부짖다가 모르는 것을 들이받고 싶다
내 희뿌연 안경 굴레속에서나 가능한 상상
그런 일들이 천천히 겨울과 어울려가면
흰 뼈들을 다시 일깨울 수 있다면
내일을 잠깐 기대해도 좋다 믿으며 잠들 텐데
어차피 잠자는 동안에는 혹한기니까
이불 밖으로 나온 두 발을 잘라두고 올 텐데
(중간 부문 생략 )
겨울돼지들
이것 봐, 반복은 영원의 수갑이야
영원은 불가능의 뿔이야
곰삭은 바닷마을로 내려와 작은 문들 부수고 다니는
겨울 돼지들 위해 미리 감자 몇 개 삶다가
이것이 그들에게 미련을 주면 어쩐담
경찰이 총을 난사해도 돼지가 죽게 되어 있고
동네 개들이 호되게 짖고
세상 끝으로 가거든 삼엄한 매립지에
구더기들처럼 파묻히게 되는 겨울 돼지들
악취가 덜 나 그나마 다행인 겨울 돼지들
죽고 또 죽고 또 죽어도
산에서 내려오는 돼지들의 겨울은 정확하고
겨울잠은 만성 피로인 그들에게 효능이 없다
인간의 낭만적인 묘사만 있을 뿐
죽어서도 반복된다니
저택 거실창 너머로 아득해진 창공을 보면서
어둠을 들이받으며 더 어두워지려고 하는
돼지들의 몸살을 눈으로 보며....
뿔과 뼈를 버리고 떠나온 곳에서는
영원을 어기고 잠깐만 같이 놀자
나 놓고 갈 것이 많구나
(나머지 뒷부문 생략)
*시집, 휴가저택, 아침달
# 서윤후 시인은 1990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갓 스무 살 대학 재학 중에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이 있다. 재능이 엿보이는 시인이다.
야금 야금 읽으면서 한 편씩 음미하는 시가 있는 반면 단숨에 읽어 내려가야 긴장감이 끊기지 않는 시가 있다. 서윤후의 <휴가저택>이 그렇다. 어느 인생의 비밀을 캐려고 생애에 잠입한 젊은 탐정의 비망록을 보는 느낌이랄까. 제목부터 풍기는 냄새가 심상찮은 시집이다. 시 한 편을 다 읽는 데 오십 분 남짓, 밑줄을 긋고 싶은 확 깨는 문장은 없어도 묘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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