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휴가저택 - 서윤후

마루안 2019. 1. 8. 19:45



휴가저택 - 서윤후



8.

이곳은 사방이 지뢰
우리가 빛은 사랑을 끝까지 벗겨내자
겨우 숨통을 쥐고 있는 헐떡임을 볼 때까지
닿자마자 녹아버릴 체온으로 드러날 때까지


자, 이제 이것을 트뜨린다
하나, 둘, 셋 하면


어두워진다는 것은 무언가 장전된다는 것
방금 나는 표적이 된 것 같다
내가 깨지면 내 눈동자에 품고 있던 당신도 깨지고
산산조각으로 흐트러진 우리가 뒤섞인다


그렇게 비로소 하나처럼 보이는 것


여기는 사방이 지뢰
죽음으로 충만해진 인간은
사는 동안 잊으려고 했으나 군더더기만 남긴
추악한 기억의 보관함
거대한 종량제 봉투


입술을 묶어
입술을 묶자


나와 함께 자폭하지 않겠는가
먼 하늘에서 별처럼 보일 수 있게 산산조각이 나서는
어린 연인들의 별자리로 불리지 않겠는가


하는 수 없이 부르는 이름을 듣게 되고
하는 수 없이 돌아보게 되는


(중간 생략)


어차피 늙은 삶은 젊은이들이 갈아입게 될 머나먼 유행이다. 새것과 처음인 것만 쫓는 인간들의 거울은 유리와 아주 먼 곳에 놓여 있다. 오늘의 경향을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자주 아플 수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늙는다는 건 배열과 나열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이 삶의 기나긴 전쟁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 싸움만이 지속된다. 배신의 원흉만이 다음을 낳는다. 그러나 인간은 속절없이 불량한 기계들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계에 갇혀 기계 밖을 상상하는 순간만이 희열임을 아는, 죽는다고 하여 기계를 탈출할 수 없다. 이 거대한 기계에 오류를 내는 것만이 인간의 업적이다. (나머지 생략)



*시집, 휴가저택, 아침달







*후문


어떤 날에는 더 이상 간절함이 가능해지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 불가능의 간절함이 무엇으로 탈바꿈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휴가저택>은 그 가능과 불가능이 여름의 옷을 빌려 힘겹게 싸워가는 모든 과정의 상영관이자 내 영혼을 청바지처럼 잘 개켜놓고 떠나게 될 곳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잠시 다녀왔다.


<휴가저택>은 내 이십 대 마지막 책이다. 어쩌면 나는 이 세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며, 돌아와도 더는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나의 사유지였던 그러나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저택에 사람들의 다녀간 흔적, 앉아 있던 자리, 머물렀던 유리창 얼룩 같은 것을 살피며 나의 이십 대 끝자락을 돌이켜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후문 부분 발췌)






# 짧은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산문 長詩다. 딱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하나의 제목에 숫자로만 연을 나눴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 옮긴 시에 번호가 붙은 것도 그 이유다. 긴 호흡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 문장을 끌고 가는 젊은 시인의 탁월한 재능이 느껴진다. 뜬구름 잡는 난해한 시가 난무하는 작금의 시판에서 보기 드물게 공감 가는 시를 쓴다. 길게 지켜볼 만한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