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저택 - 서윤후
8.
이곳은 사방이 지뢰
우리가 빛은 사랑을 끝까지 벗겨내자
겨우 숨통을 쥐고 있는 헐떡임을 볼 때까지
닿자마자 녹아버릴 체온으로 드러날 때까지
자, 이제 이것을 트뜨린다
하나, 둘, 셋 하면
어두워진다는 것은 무언가 장전된다는 것
방금 나는 표적이 된 것 같다
내가 깨지면 내 눈동자에 품고 있던 당신도 깨지고
산산조각으로 흐트러진 우리가 뒤섞인다
그렇게 비로소 하나처럼 보이는 것
여기는 사방이 지뢰
죽음으로 충만해진 인간은
사는 동안 잊으려고 했으나 군더더기만 남긴
추악한 기억의 보관함
거대한 종량제 봉투
입술을 묶어
입술을 묶자
나와 함께 자폭하지 않겠는가
먼 하늘에서 별처럼 보일 수 있게 산산조각이 나서는
어린 연인들의 별자리로 불리지 않겠는가
하는 수 없이 부르는 이름을 듣게 되고
하는 수 없이 돌아보게 되는
(중간 생략)
어차피 늙은 삶은 젊은이들이 갈아입게 될 머나먼 유행이다. 새것과 처음인 것만 쫓는 인간들의 거울은 유리와 아주 먼 곳에 놓여 있다. 오늘의 경향을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자주 아플 수 있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늙는다는 건 배열과 나열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이 삶의 기나긴 전쟁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 싸움만이 지속된다. 배신의 원흉만이 다음을 낳는다. 그러나 인간은 속절없이 불량한 기계들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계에 갇혀 기계 밖을 상상하는 순간만이 희열임을 아는, 죽는다고 하여 기계를 탈출할 수 없다. 이 거대한 기계에 오류를 내는 것만이 인간의 업적이다. (나머지 생략)
*시집, 휴가저택, 아침달
*후문
어떤 날에는 더 이상 간절함이 가능해지지 않을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 불가능의 간절함이 무엇으로 탈바꿈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휴가저택>은 그 가능과 불가능이 여름의 옷을 빌려 힘겹게 싸워가는 모든 과정의 상영관이자 내 영혼을 청바지처럼 잘 개켜놓고 떠나게 될 곳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잠시 다녀왔다.
<휴가저택>은 내 이십 대 마지막 책이다. 어쩌면 나는 이 세계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며, 돌아와도 더는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나의 사유지였던 그러나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저택에 사람들의 다녀간 흔적, 앉아 있던 자리, 머물렀던 유리창 얼룩 같은 것을 살피며 나의 이십 대 끝자락을 돌이켜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후문 부분 발췌)
# 짧은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산문 長詩다. 딱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하나의 제목에 숫자로만 연을 나눴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 옮긴 시에 번호가 붙은 것도 그 이유다. 긴 호흡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 문장을 끌고 가는 젊은 시인의 탁월한 재능이 느껴진다. 뜬구름 잡는 난해한 시가 난무하는 작금의 시판에서 보기 드물게 공감 가는 시를 쓴다. 길게 지켜볼 만한 시인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왼쪽이다 - 박소원 (0) | 2019.01.09 |
---|---|
겨울, 짧고 뜻밖이라는 번외 - 서윤후 (0) | 2019.01.08 |
그대는 오지 않고 - 김중식 (0) | 2019.01.08 |
겨울 초상 - 권오표 (0) | 2019.01.07 |
주지암(住智庵)은 있다 - 한영수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