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 초상 - 권오표

마루안 2019. 1. 7. 22:30



겨울 초상 - 권오표



이번만은 기어이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북창(北窓)을 할퀴는 눈보라에 산골 마을은
잠들지 못하네
맞장 한번 떠보겠노라고 등뼈를 곧추세운 대숲은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지 연신 가쁜 숨비소리를 내네
이장집 영감님은 새 달력에서
이태 전에 먼저 간 할멈의 제삿날을 더듬고
마을 젊은이들은 사랑방에 모여
하 수상한 시절을 안주 삼아
밤 깊도록 섯다 패를 돌리네
눈 덮인 빈들에서 벼 포기는 단발령에 잘린 상투처럼
연대를 이루어 전열을 가다듬는데
나는 앞강이 쩡쩡 우는 소리를 들으며
식어 가는 구들장에 엎드려
통속 소설에 킬킬대거나 수음을 하는 일
지난 밤 꿈에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진 은빛 여우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일



*권오표 시집, 너무 멀지 않게, 모악








구이(九耳)*에서 - 권오표



고기비늘 같은 눈발들이 강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아직 서러움이 남은 것들은 떼 지어
낮은 포복으로 마른 풀들을 흔들며 버텨보지만
갈라진 배를 드러낸 하구는 늙은 창녀처럼 무심히
눈발들을 받아 안을 뿐이다
얼마나 허구한 날들을 간단없는 슬픔으로 견뎌야 하는가
오래 감춰진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가려워진다
저수지 건너
한쪽 정강이가 젖은 팽나무는
겨드랑이의 뾰루지를 바람에 맡긴 채
흐린 그림자만 물 주름져 흐느적거린다
등 돌려 도리질하던 숱한 다짐들은
지워진 길 위에서 목울대로 차오르고
처마 밑 무말랭이는 저녁연기에 시름시름 야위어 간다
이따금 아궁이에서 튀겨 오른 불티들이
눈발에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문득,
모악의 골짜기 눈물 진 자리
설해목(雪害木) 한 가지 관절처럼 꺾여 폭설에 묻힌다



*전주 근교의 모악산 아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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