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생애 - 윤의섭
그걸 잔상 효과라고 하지 아마
생나무를 무덤 가린다고 잘라냈는데
둥지 틀었던 새들이 앉을 자릴 찾아 맴도는 거
머리를 잘리고서도 잠시 퍼덕이는 생선
불에 그슬리던 개는 생각난 듯 일어나더니 묵묵히 걸었지
지독한 놈들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가게문을 닫았다
평생 밭 부치던 아버지는 악다물고 내지르던 호미자루를 부장품 삼아
밭머리에 묻혔지
초생달이 떠오르면 밭을 매는 아버지 그림자를 본 듯도 했다
아직도 남아 계신 건가
그는 새벽 두 시까지 가게를 지키다 잠이 들곤 했다
요즘엔 부쩍 우울한 얼굴로 서성이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은 거무죽죽한 얼굴을 하고
가게문을 닫고 있는 자신의 얼굴도 보였다
*시집, 천국의 난민, 문학동네
천국의 난민 - 윤의섭
오후엔 한 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그 밤에서야 은행나무 푸른 잎은 노란 눈꺼풀을 내린다
새벽까지 구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
천년 만에 찾아온다는 혜성은 그렇게 빗겨 갔다
들녘에선 바람이 바람 속에 파묻히고
어디선가 사내를 가슴에 묻은 여인네의 곡소리를 끌고 왔다
진달래가 피어도 지난날은 여전히 작부였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생은 늘 흐드러진 노랫가락만 불어젖혔다
죽은 자들이 머금은 한 줌 숨결 같은 미련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백일몸에서 깨어난 적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꿈을 꾼 적 없다
집에 돌아간 적도 없고 파멸에 이른 적도 없이
때로 행복하여 꼿꼿이 선 채 죽어간다
따사로운 햇살이 오래 내리쬐니
이제 온전한 미라들이 생겨날 것이다
# 윤의섭 시인은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으로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이 있다. 대전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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