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엘레지 - 이은심
죽음도가끔 예약날짜를 잘못 알고 젊은 영정 사진을 찾아든다
각자의 슬픔을 들고 칸칸이 헤어지는 복도 끝
검은 리본의 꽃들이 빙 둘러앉아 잇몸을 드러낸다
꽃의 결점은 지나치게 잘 웃는다는 것이다
심드렁할 때는 더욱
시커먼 목울대가 보이도록 웃는다는 것이다
조문객들이 쌓아놓은 국화 옆에서
영정도 싱글벙글 웃고
계단 아래 만장 휘날리는 꽃길
조용한 뒷자리 한 울음을 찾기까지
배웅을 받으러 가야 하는
장례식장 특1호실
기가 막혀 이틀 사흘
죽을 때까지 웃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것이 또 애절한 울음이어서
왁자하게 웃으면서 시드는
당황하는 상처의 벌어진 틈
*시집, 바닥의 권력, 황금알
눈사람 영정 - 이은심
골짜기 그늘과 산등성이를 두루 거쳐 언니들이 왔다
자드락밭에 서 있기만 해도 어떤 태생은 그윽해서
찰랑이는 은빛 고리의 집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자정에 낳아놓은 언니들은 말수가 적었다
좀 더 냉정했더라면 앞산만큼 대가 센 언니들을 낳았을 텐데
하얀 목에 깃드는 매화 이른 가지를 주워 올릴 때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고 누군가 뜨거운 오줌발을 뿌리고
생각해보니 오래 고생한 언니들의 병명도 묻지 않았다
목도리를 두른 적설의 변명도 듣지 않았다
잠시 나의 사람이었던 사랑은 왔다가 되짚어가고
이름을 부르면 다시는 오지 않는
모든 그리운 것들처럼
친애하는 언니들이 진종일 입술을 새파랗게 팔았다
껴안으면 녹아내리는 익명
근질거리는 발밑에 복수초 화환을 둔
어떤 태생은 끝내 자신이 낳은 어린 것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 이은심 시인은 1950년 대전 출생으로 한남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얏나무 아버지>, <바닥의 권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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