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출근길, 완행으로 걷다 - 장승욱

마루안 2019. 1. 6. 19:16



출근길, 완행으로 걷다 - 장승욱



전철은 브레이크 밟아
완행으로 늦출 수 없지만
그래서 당산과 합정 사이 지나며
내 사랑 한강과 오래 눈 맞출 수 없지만


홍대입구역에서 사무실까지는
완행으로 걸어도 된다
두리번거리고 기웃거려도 된다


집집의 문패 이름도 읽어 보고
주차금지 팻말, 요가 광고에도 눈길 주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셔 볼까 고민도 하고


삐죽삐죽 내미는 새순들 응원도 하고
가지에 앉은 새들 수다도 엿들으며
가끔은 멈춰 서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출근길, 이렇게 완행으로 걷기 위해
나는 아침을 거르고 나왔다



*시집, 장승욱 시, 지식을만드는지식








나는 왜 - 장승욱



나는 왜 더 과격하지 못했을까
내 안의 붉은 핏방울들 터뜨려
세상을 물들이지 못했을까


스스로 만들어 낸 갖가지 핑계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직진보다는 늘 우회로 표지가
먼저 눈으로 들어왔다


나는 왜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을까
얼어붙은 산맥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고난과 신산(辛酸)만이
내 운명으로 주어질지라도
그곳에 가야 했다는 쓰디쓴 후회!


나는 왜 더 과격하지 못했을까
언제나 세상의 비위를 맞추며
빙충이처럼 살아왔을까
내 안에 흐르는 붉은 피를 외면하면서






# 영화 <말모이> 개봉 소식에 시집을 다시 읽었다. 장승욱은 우리말을 사랑했던 시인이자 낭만적인 술꾼이었다. 그의 시를 늦게 알았지만 유고 시집에 실린 이 두 시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들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겠느냐만 완행으로 걸었던 출근길을 끝내고 일찍 세상을 떠난 시인의 생애가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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