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라져 버린, 10시 - 김요아킴

마루안 2018. 12. 30. 19:17



사라져 버린, 10시 - 김요아킴



욕탕은 고요하다


새벽을 틈타 한바탕의 왁자한 물갈이가 끝난 오전 10시,
몇몇 벌거벗은 실루엣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드문드문 평화를 누린다


피어오르는 김은 주어진 자유만큼 적당한 온기를 더해준다


서로에게 나눠야할 따뜻한 물이 여전히 넉넉한 10시,
무심코 누군가가 열어둔 창문 틈으로
두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든다


일순 제멋대로 휘젓는 날갯짓
타고난 저의 상징을 깨어버린다


순간 내려앉는 10시,
수도꼭지 위로 혹은 천정 환풍기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도처에서 반사적으로 일어서는 손가락의 무리
불 켜진 초처럼 쫓아보지만 역시 쥐구멍의 꼬리 같다


몇 개의 깃털로 당황함을 떨어뜨리고
오히려 형광등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점점
어둠의 자국들을 찍어나간다


누군가의 방심한 그 창문 틈으로
오른 날개가 더 커 보이는 그림자 대신
10시의 일상은 소리 없이 사라져간다



*시집, 행복한 목욕탕, 도서출판 신생








행복한 목욕탕 - 김요아킴



샤워꼭지의 물줄기는 여전히 건강하다

기름기 빠져가는 퇴적된 생
귀가 순해진다는 화두를 붙잡고
젖은 수건으로 명상을 한다

욕탕 같은 수원지를, 이른 새벽
해가 뜨고 지는 방향으로 순례하다 보면
소금기어린 추억들은 이슬처럼 매달린다


한 번도 자신들을 위한 발자국을
찍어보지 못한 나날들

조금씩 휘어지는 등은
세월의 각질처럼 굳어져 가지만


동심으로 가득 찬 대공원 숲길을 나서면
탁탁, 지팡이를 좇아 드러나는 그곳은

부뚜막 위로 어머니의 손길이
찰랑거리는 물소리로 와 닿는
영육이 깨끗하게 표백되는 행복한 소도(蘇塗)

꿈꾸듯 유년의 알갱이 하나 물고는
귀향하는 마음으로 모두들 모여드는

할인된 생이지만, 여전히
수도꼭지의 물은 콸콸 쏟아진다






# 김요아킴 시인은 특이한 필명을 쓰는데 본명은 김재홍이다. 아마도 동명의 시인이 있어서일 거다. 1969년 경남 마산 출생으로 경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가야산 호랑이>, <어느 시낭송>, <왼손잡이 투수>, <행복한 목욕탕>, <그녀의 시모노세끼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