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빛 하얀 가면 - 안현미

마루안 2018. 12. 29. 21:35



달빛 하얀 가면 - 안현미



소리를 버린 사내와
소리를 얻지 못하고 내 안에서만
달그락 거리는 나의 소리들
그 소리들이 너와 내가 앓고 있는 상처라면
언젠가 찬란한 햇빛 속에서 태양의 흑점 같은 사내를 만나
아픔 없이 뽀송뽀송 말릴 수도 있을까, 혼자 중얼거리는 오후
만리독행, 너는
오늘은 마르셀 마르소의 가면을 쓰고 내게 말을 거는구나
'누나가 고독을 알아?'
'흐흐, 고독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야?
그게 고독(高毒)이라면 내 아버지의 발광 같은 거니?'
그 발광(發狂)으로부터 나의 초경은 시작되었다
그 분꽃 같은 혈흔 속에 나는 아버지를 묻었다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와 나의 가계에 대하여
그러나 고독은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는 문지방을 베고
나는 아버지의 팔을 베고
엄마의 멍든 뼈는 문지방을 넘지 못하던
여름 밤의 달빛 하얀 가면 같은 것
우물가에선 말갛게 분꽃이 피고
초경 같던 그 초승달이
전생부터 고독했음을 나는 이제서야 알겠다
그러니 나는 고독은 모르고 고독한 초생달만 아는
부풀지도, 늙을 수도 없는 달이구나
만리독행, 나는



*시집, 곰곰, 문예중앙








실패라는 실패 - 안현미



퇴근길 청량리 종점행 지하철에서
발음이 뭉개진 어떤 사내
바늘이 들어 있는 실패를 불쑥 들이민다
사내는 자신의 발음처럼 뭉개진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졌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지불하고 산 실패
어쩌면 사내는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뭉개진 생(生)을 팔고 싶었을지고 모른다고,
사창가를 지나며 중얼거린다
통유리창 마네킹 같은 어린 창녀 아이
몇 개의 실패를 팔고 싶으세요?
저는 대충 빨리 늙어도 괜찮거든요,
하는 얼굴도 내 손안에 있는 실패를 본다
너는 내 실패도 받아주고 싶은 거니? 어째서?
패를 잘못 뽑아든 어린 창녀 아이와
홍등 아래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실패를 감아준다
실패엔 나와 발음이 뭉개진 사내와 어린 창녀 아이의
엉킨 실타래 같은 꿈이 감긴다
색색깔의 실패!
사내는 뭉개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실패를 팔고
어린 창녀아이는 바늘을 집어삼킨 얼굴로 실패를 살고
나는 곰곰이 실패라는 실패를 바느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