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장천을 보며 - 황학주

마루안 2018. 12. 29. 21:07



지장천을 보며 - 황학주



더 검으면 더 강할 지장천변의 삶에
간 치지 않은 건대구 길쭉길쭉 뜯듯
진눈개비 떨어질 때
벌벌 흔들리는 검은 핏덩이들의
서럽도록 뜨거운 것이 밑불로 살아 있는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알았지만,


완행이 놓쳐 버린 소읍의 시간
딸라 이자처럼 늘어나며 후비고 들어오는 눈 속으로
사북 3리 검은 삶 앞에 선 나의 사랑은
아 나의 사랑은 썩은 정육처럼 유리창 안에 내걸렸지 아니면 무엇이냐
경기(驚氣)가 일어나며 미칠 것 같은 울음이 터지는데
괜찮아져 괜찮아져 폭설이 된 과신(過信)을 끌어안았지
아니면 구두처럼 닦은 나의 절망이란 것도 너무나 세련된 것이었지, 아니냐
병반 광부와 을반 광부가 교대하는 이 시간에
사랑이라는 말의 뜻은 알지만
아아 싱싱한 손이 튀어나가는 사랑을 마련하지 못한 밤에.



*시집, 사람, 청하출판사








혹한 - 황학주



1급 정비 공장의 엔진이 죽은 트럭을, 치우며
죽물 하나 입을 벌리고 있는 대청 위로
올라오는 눈송이(어서 오게)


사랑이
더럽게 식은 비계국 같은 저녁
가슴 중앙에 남은 물구덩이 얼고 있으므로
나는 형제가 두렵고
가슴이 아파서 이 땅에선 못 살겠다.


이제 누구든 한 번만 엎어지면 뒷등으로 올라올 저 눈송이.





# 황학주 첫 시집에 실린 시로 자주 읽는 시다. 그런데 <상처학교>라는 시선집에 많은 부분이 수정되더니 두 번째 시선집인 <행복했었다는 말>에서 또다시 여러 부분을 고쳤다. 미진한 곳을 손보고 싶은 시인의 완벽증을 이해하면서도 첫 시집에 실린 시가 순수해서 좋다. 성형수술을 한 시들과 비교하면 첫 시에서 열정적인 미숙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나는 형제가 두렵고 가슴이 아파서 이 땅에선 못 살겠다>는 구절이 왜 그렇게 시리게 다가오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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