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안의 블루 - 서규정

마루안 2018. 12. 28. 20:10

 

 

내 안의 블루 - 서규정

 


낙석 하나가 분화를 꿈꾸는 지층을 깨우듯
내 몸을 흔드는 정체불명의 힘,
블루라는 낯선 말이
간간이 극장 포스터나 술집 이름으로 등장할 때에도
뭐 현대인의 색다른 기호나 유희성이겠거니 하다가
자갈치 물양장에서 은하호를 보는 순간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어

전선과 전선이 담쟁이 넝쿨처럼 우거진
교각 밑에선 노약자 노숙자들은 노을과 놀고
관리들은 꼬리 잘린 도마뱀과 놀고
공적자금은 밑 터진 독과 놀고
우울이 껌처럼 늘어붙는 거리
평생을 구두 발자국만 새긴 어느 판화가의 생애를 위해서라도
어디로 떠나가 줄까 더 이상
발자국을 뜯어 먹히기 싫어…그러니까
얼마나 이 땅의 기다림과 그리움들이 다했으면
덧문을 닫아 걸 이 나이에
나를 끌어내는 정염의 덩어리를 찾아
맨발로 99톤 은하호에 오르기 전에

가방에 담았던 면도기 치약 몇 권의 노트를 꺼내고
내 그림자와 백병전을 벌이던 몸통을 쑤셔 박았지
자크를 열고 나오려는 팔다리를 우둑우둑 분질러
다져 넣으며 나도 모르게
죽어서 다시 살아!
손에 묻은 분진을 털며 외쳤어

 


*시집, 겨울 수선화, 고요아침

 

 

 

 

 

 

치킨 치타 - 서규정

 


조금만 낮게 끌어가소서
바닥을 훑을 수 있어야 배도 뜨고
바닷새도 덩달아 날던 것을
늙어 산토끼처럼 하얗게 쇤 어머니 홀로 남겨둔 산동네
하루에 두 번 가는 검은 태양이 연탄집게에 찍혀선,
지랄 세상에서 제일로 넓은 직장을 얻어 나간다고!?
퓨리턴의 초상들이 군웅할거 하는 곳이 바다라니까요!
그려 미국본토로 공 던지러 간 영웅들은 더러 보았다만
그 나이에 갈치 잡으러 가는 군상들은 보들 못했다
농담 끝에 매달린 그 눈물이 하도 선해선,
가고 오고 오고 가는 바닷길이
내겐 새로 난 신작로일 것임에, 저 바다에
가로수도 심고 뭇 생명을 노래하며 나를 찾아야 합니다
남들은 잃어버린 애도 찾는데 너는 아직 너도 못 찾았단 말이냐
찾지 못할 너를 이제 그만 풀어주고
고등어나 두어 마리 사들고 와 보일러나 놓고 살자
어머니의 한숨이 동중국해까지 뭉게구름으로 따라올 것 같고,
천마산이 자꾸만 냉동창고 뒤로 숨던
자갈치에서 나 떠나던 배에서 내려
붕어빵 한 봉지 사들고 산동네를 올라가다
켄터키 후라이드치킨 진열장 앞에 일렬로 늘어서
닭처럼 졸고 있는 노인네들 틈으로 다가가
어머니! 하고 불렀더니

옛!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장천을 보며 - 황학주  (0) 2018.12.29
흔적에 대하여 - 임동확  (0) 2018.12.29
시베리아행 열차 - 오광석  (0) 2018.12.28
어쩌다 실연 - 전윤호  (0) 2018.12.28
내가 사람이 아니었을 때 - 조용미  (0) 2018.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