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흔적에 대하여 - 임동확

마루안 2018. 12. 29. 20:57

 

 

흔적에 대하여 - 임동확

 

 

어느 케케묵은 책갈피 72페이지와
73페이지 사이에 희미한 커피 얼룩은
언제, 무슨 일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는지

흔적은 그저 흔적일 뿐이라는 듯
오히려 필생의 비밀처럼 아득하고 난감해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느닷없이 엎질러진 커피에 민망해 하며
서로의 옷에 튄 커피 방울을 털어내고
필시 바닥에 떨어져 깨진 커피 잔을 쓸어내고
탁자를 물걸레로 훔쳐냈을 소란함도, 분주함도 없다

그러니까 그 커피 향이 뜻밖에 가져다준 선물은
이미 존재했던 사실의 확인이 아닐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그 어리둥절한 거리만큼 어둡고
신비로운 너의 육체 같은 전망에 대한 탐험이며,
매번 다른 미래의 책장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는 일

낡은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 버린 사태들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재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갈수록 패잔병처럼 도주하는 황혼의 지평선,
몇 겹으로 덩굴진 시간의 사타구니로 접어들어 가는 일

기울어진 방 기둥과 투명테이프로 덧댄 깨진 창문,
지붕을 타고 기어오르던 호박덩굴과
개미처럼 기어 나오는 전혀 낯선 줄거리들이 뒤엉킨 채
불가사의한 어둠의 심연에 순금처럼 가라앉아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커피 자국 아래 남아있는 것들은
놀랍게도 너와 나의 기억 속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들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추억들이 불멸의 순간,
언제, 어디서고 불타오르는 환한 미지를 불러들이고 있다


*시집,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신생

 

 

 

 

 

 

되새 떼처럼 - 임동확

 

 

아무도 주의를 끌지 않던 젊은 날의 순결한 피 한 방울이

놀란 한 마리 되새처럼 튀어 오른다. 잠시나마 웃고 떠들며

애써 위로와 평안을 구하던 날들이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곡예비행을 채 마무리하지 못한,

해가 진 뒤에도 여전히 귀환하지 못한 한 시절의 낙오병 같은 새들이

어느새 어둑한 하늘의 검은 비닐봉지들처럼 떠돌고 있다.

한때 수천만의 되새 떼처럼 하늘로 치솟아 올랐을 때 환희라 불렸으며

공중의 돌맹이처럼 형편없이 추락했을 때 기꺼이 비애라고 이름했던,

돌아보면 지극히 부끄럽고 서툴렀던 청춘의 날갯짓들이

거대한 군무(群舞)를 펼치며 먹구름 낀 노을 속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

그새 어두워진 월동의 대나무 숲에 누구도 소등하지 못할 등불 하나,

스스로 깨어난 불멸의 순간들이 때아닌 번개처럼 번쩍이고 있다

 

 

 

 

# 임동확 시인은 1959년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서강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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