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베리아행 열차 - 오광석

마루안 2018. 12. 28. 19:54

 

 

시베리아행 열차 - 오광석


롱코트 정장을 보며 쇼윈도를 기웃거리다
헐렁한 청바지에 파카로 몸을 감싸던 스무 살 즈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베리아의 공기를 몰고 와
폐 속을 헤집고 나왔을 때 그곳을 동경하게 되었다
지나치면 잊어버리는 짧은 단상들
마흔을 향해 달려가다가 떠오르는 스무 살의 겨울은
열차가 중간에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 같은 거
역에 앉아 시베리아행 열차를 기다리던 나는
바람을 타고 오는 기적 소리에
동그란 눈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칼바람 아리는 도시를 뒤로하고
가보지 못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삼등 열차 구석 자리에 앉아
일생을 꾸벅꾸벅 졸고 싶었다
황혼 즈음에 도착하는 하얀 초록의 시베리아
포근한 오두막에 누워
써먹을 데 없는 지폐들을 불쏘시개 삼아 잠들고 싶었다
입가에 흐믓한 미소를 짓다가
익숙한 경적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면
지나쳐버린 간이역 같은 단상들
스무 살에 간절했던 롱코트 정장을 입고
꾸욱 눌러 담은 서류 가방 둘러매고
매연 날리는 버스 정류소에 앉아 있다가
지나쳐가는 도시인들의 무관심에 쫓기듯 벗어났다


*시집, 이계견문록, 천년의시작

 

 

 

 



모기영화관 - 오광석

 

 

머릿속에 모기가 산다네

윙윙 울리는 소리가 들리네

두개골 안쪽 대뇌를 자극해

심연 깊은 장면들을 들춰내

필름이 윙윙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네

감은 눈꺼풀 속에 영사되는 장면들

사라져버린 탑동 바닷가 보말을 줍는 아이들

흐릿한 흑백영화 같은 시절

탑동 파도처럼 잔잔한 미소가 흐르면

다시 모기가 날아 머릿속 한 장면을 꺼내네

어린 첫사랑의 목소리

새벽 벤치에서 나눈 속삭임이 들리네

이어폰으로 듣는 FM라디오 소리처럼

머리 한가운데서 윙윙 울리다 커지면

신기한 새 생명의 소리

앙앙 우는 작은 요정을 황홀하게 바라보네

모기는 지난 추억을 찾아내는 청부사

대뇌 감정을 자극하는 모기의 수작질에

나는 타임머신을 타지 않고도

지난 시절을 다시 느끼네

윙윙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난날들이 영화처럼 다가온다면

머릿속에 모기 한 마리 더 키워도 좋네

두 귀 사이를 오가며

내 남은 젊음을 빨아먹어도 좋네

 

 

 

 

# 오광석 시인은 1975년 제주 출생으로 2014년 <문예바다>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제주작가회의 회원이며 한라산문학동인회 활동을 하고 있다. <이계견문록>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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