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억새, 여름 이후 - 한명희

마루안 2018. 12. 27. 21:53

 

 

억새, 여름 이후 - 한명희

 

 

늘 궁금했다 최루탄을 앞세운 바람에도

물폭탄에도 허리 꼿꼿하던 네가

절벽 끝에 입을 대고

까마득히 떨어지는 땀방울로 근근히 목을 축이던 네가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위하여

바라고 빌어왔던 모든 게

군화가 밟고 지나간 집에 피던 과꽃 같아서

언 몸이 불덩이가 된 채 걸핏하면

들에 나가

온종일 서슬 푸른 들이 되던 네가

어느 날 뙤약볕 아래 삽질하던 농부들의 물을 물을 찾다가

저수지에 비친 제 모습이 끝도 없이 미끄러지던

낭떠러지, 능선 같아서

산속으로 들어갔는지

심해 어디로 잠수를 탔는지 오늘도

수취인불명의 주소가 되어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네가

 

백발이 되어 흘린 눈물인 듯, 땀인 듯

날카롭게 뼈만 남은 줄기마다

이슬방울 수정처럼 맺혀 있는 네가

 

 

*시집, 마른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천년의시작

 

 

 

 

 

 

폐가 - 한명희

 

 

검게 그을린 먹감나무로 서 있다 한때 사람이었던 내가

햇볕 뒤에 숨은 그림자로

울타리를 빠져나온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울타리가 된 적이 있기는 했을까?

 

가까이 먼 곳에서 톱질하는 소리

 

백 년, 이백 년 전쯤에 목수가 살던

집에서

내가 사람으로 살던 방은 콱 막힌 동굴처럼 습하고

캄캄해서 희망이니 꿈이니 성공이니

뜻도 모르고 적혀 있던 단어들은 벽에, 책갈피 속에

곰팡이 슬고 썩어

구역질나  말로 변해 있다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두커니 달이나 별 보는 날 많아지던 마당에는

햇볕 등진 바람만 가득하고

목수가 등목 하던 수돗가엔

녹슨 물이 코피처럼 뚝뚝 떨어지고

 

한때 나를 사람이게 했던 사람은

울타리도 없는 곳에서

가시만 남은

장미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