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 여름 이후 - 한명희
늘 궁금했다 최루탄을 앞세운 바람에도
물폭탄에도 허리 꼿꼿하던 네가
절벽 끝에 입을 대고
까마득히 떨어지는 땀방울로 근근히 목을 축이던 네가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위하여
바라고 빌어왔던 모든 게
군화가 밟고 지나간 집에 피던 과꽃 같아서
언 몸이 불덩이가 된 채 걸핏하면
들에 나가
온종일 서슬 푸른 들이 되던 네가
어느 날 뙤약볕 아래 삽질하던 농부들의 물을 물을 찾다가
저수지에 비친 제 모습이 끝도 없이 미끄러지던
낭떠러지, 능선 같아서
산속으로 들어갔는지
심해 어디로 잠수를 탔는지 오늘도
수취인불명의 주소가 되어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네가
백발이 되어 흘린 눈물인 듯, 땀인 듯
날카롭게 뼈만 남은 줄기마다
이슬방울 수정처럼 맺혀 있는 네가
*시집, 마른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천년의시작
폐가 - 한명희
검게 그을린 먹감나무로 서 있다 한때 사람이었던 내가
햇볕 뒤에 숨은 그림자로
울타리를 빠져나온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울타리가 된 적이 있기는 했을까?
가까이 먼 곳에서 톱질하는 소리
백 년, 이백 년 전쯤에 목수가 살던
집에서
내가 사람으로 살던 방은 콱 막힌 동굴처럼 습하고
캄캄해서 희망이니 꿈이니 성공이니
뜻도 모르고 적혀 있던 단어들은 벽에, 책갈피 속에
곰팡이 슬고 썩어
구역질나 말로 변해 있다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두커니 달이나 별 보는 날 많아지던 마당에는
햇볕 등진 바람만 가득하고
목수가 등목 하던 수돗가엔
녹슨 물이 코피처럼 뚝뚝 떨어지고
한때 나를 사람이게 했던 사람은
울타리도 없는 곳에서
가시만 남은
장미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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