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집 한 채 - 박노해
눈 내리는 태백산에서 길을 잃었다
멈추면 얼어오고 걸으면 앞이 없고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갇혀
무릎까지 쌓인 눈 속을 마냥 제자리걸음 할 때
몸이 떨리고 탈진한 것보다 더 무서운 건
희뿌연 눈보라 속의 적막, 길 없는 적막,
사륵사륵 차오르는 침묵의 공포였다
조금씩 옅어지는 눈발 속에서
환영인 듯 희미한 빛이 보였다
낡은 너와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놀란 할머니는 자녀를 대처에 보내고
홀로 감자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동태국을 끓이고
김장독에 묻어둔 김치를 꺼내주시는 할머니
나는 설거지도 못 해 드리고
슬며시 쓰러져 죽은 듯 잠들었다
할머니와 소와 개와 닭과 함께
눈 속에 덮인 너와집에서 며칠을 먹고 자며
눈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너와집 툇마루에 앉아
겨울 햇살에 눈 시린
하얀 산맥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소 여물을 주던 할머니는 아이고 고마워라
멀고 험한 눈길 오느라 얼마나 애썼소
편지 한 통 250원인데... 미안해 어쩌노
나라가 참 고맙다
내가 어서 죽어야 수고가 덜 텐데
들어와 동치미에 고구마라도 먹고 가시제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체부 오토바이 뒤에 앉아 눈 속을 빠져나가며
편지 한 통 250원인데... 나라가 고맙다...
할머니 말씀이 메아리처럼 울려오는데
태백산 오지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한 분
험한 눈길을 미끄러지며 배달 온 우체부
250원짜리 편지 한 통
이제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면
길 잃은 나는 눈 속에 얼어 사라지고
태백산 오지에 멀리 떨어진 너와집 한 채만큼
우리 삶의 반경은 확연히 줄어들고
250원짜리 편지 한 통 배달하러 눈길을 헤치고 온
고마운 우체부도, 고마운 나라도 사라지고
비용대비 수익과 효율과 경쟁력의 외침만 날카로운
편리한 도시가 가까워 올수록 세계는 불안하고
눈 덮인 태백산처럼 유장하고 힘차던
내 야생의 심장박동 소리는 죽어가고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는 굶어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 며칠 포근하더니 저녁 무렵부터 찬비람이 불면서 어김없이 세밑 한파가 몰려온다. 문 대통령이 성탄절에 남긴 글에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를 인용했다. 나도 고마운 마음에 다소 긴 시를 또박또박 적어 함께 올린다. 잔인한 정치판에서 선한 의지의 권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깨닫는다. 시인 또한 평생 낮은 곳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사람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문 대통령과 꼭 닮았다. 이 시를 인용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매서운 한파에도 내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오늘밤 누군가는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누린 이 편리함과 행복은 남에게 뺏은 것은 아닐까? 고맙고 미안하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억새, 여름 이후 - 한명희 (0) | 2018.12.27 |
---|---|
그런 나이 - 정성환 (0) | 2018.12.27 |
어느 휴일, 고갈산을 바라보며 - 전성호 (0) | 2018.12.26 |
지천명(知天命) - 황원교 (0) | 2018.12.25 |
내 부족함은 좌파인 빗소리로 채워진다 - 김명인 (0) | 2018.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