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휴일, 고갈산을 바라보며 - 전성호

마루안 2018. 12. 26. 22:15

 

 

어느 휴일, 고갈산을 바라보며 - 전성호


내 야윈 살을 만지면, 문득 죽음이란 낡은 단어가
몸의 골짜기로 침잠해 있다
한겨울 빈 들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내 귀때기를 스치는 스산한 바람이 차다
내 생의 뒷마당에는
집요한 욕망의 빈 보따리만 뒹굴고
한덩이 얼음 같은 꿈만 안고 있다
내 존재가 저 고갈산 중턱에 떠밀려
지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안개를 따라가고 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한낱 품 갚음
죽는다는 것은 환송이다
넋의 비곗덩이 남기고
죽살이 굴레를 훌훌 털고 떠나는 남자
증증 하늘로 오르는 안개여!

우리 언제 저 은빛 날개처럼
연습 없이 이 섧은 지상을 떠날 것이다

 

 

*시집,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 창비

 

 

 

 

 

 

바람 쉬어가는 벌판에서 - 전성호

–미얀마, 바간 가는 길

 

 

검붉은 탑들이 하늘 떠받치고 있다

휑한 푸서리의 벌판, 흑백필름 속의 풍경

오가는 구름 물갈기 흩날리며

짐승처럼 물속을 뛰쳐나온다

꿈은 형식보다 본능에 가깝다

 

싸릿대 엮은 울타리 안

무 배추 밭뙈기 따라 나비 원을 그리고

억새풀 오솔길가 살살이꽃 피워

하얀 구름장 띄우는 외롭고 긴 손

꿈속인가 지금은

망고나무 사이 합판때기 지붕 위로 참새가 울면

더러는 나이 더해가는 아내가 그리워질까

 

호박꽃이 주둥이 문지르며 돌아다니는 돼지들

네발 달린 것들도 경계를 지우다보면

언젠가 어깨에 날개가 돋을까

서울보다 두시간 반 늦은 야자 그늘에서

혼자 빨간 숯불을 피우는 이방인의 꿈

갈멍덕 덮어쓴 채 남은 생을 기워가며

조랑말이 끄는 수레바퀴 돌리면서

저 거리 아이들의 몸에 뿌리내린 야자나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