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천명(知天命) - 황원교

마루안 2018. 12. 25. 19:39



지천명(知天命) - 황원교



이대로 주저앉거나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며

주어진 길을 완주하는 것뿐


다만, 귀는 활짝 열어놓고

될수록 입은 다문 채

손아귀에 꼭 쥐고 있는 것들 미련 없이

훌훌 내려놓으면서



*시집, 오래된 신발, 문학의전당








성탄의 저녁 - 황원교



해 저물녘

예보에도 없던 눈발이 날리고

화들짝 놀란 유리창마다 전등불이 켜지면

삶은 더욱 아득해지고 눈물겨워진다

켜켜이 밀려오는 어둠을 베어버릴 듯이

사선으로 사선으로

서슬 퍼런 칼날을 내리치는 눈발을 바라보며

심연으로 깊게 가라앉는 마음,

저 사나운 눈보라에 몸을 떨며

지금 길 위에서 돌아갈 집이 없어 서성이는 사람들과

어느 처마 밑에서 눈을 털고 있을 사람들과

세상의 모진 덫에 걸려 울부짖고 있을 사람들과

감옥의 창밖으로 희끗희끗 스치는 눈송이를 내다보며

추회(追悔)의 눈물로 기나긴 편지를 쓸 사람들과

폭설로 길을 잃고 헤맬 허기진 산짐승들과

대지의 모든 정령들에게도 안부를 전하며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위로를 보내는 동안

여기 따뜻하게 쉴 집이 있는 내가

괜스레 미안함에 불콰해지는

성탄의 저녁,

은빛 세상을 가로질러

굽이굽이

눈물의 강 한 줄기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