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골목에 갔었네 - 백무산
옛 골목에 갔었네 습기가 그리워서라고 해야겠네
낡은 점방과 중고 전파사와 오색천 감긴 대나무 깃발 세운 무당집이
그대로인 골목 녹슨 철대문에 더께 칠한 페인트
흙먼지 하나 없이 덕지덕지 발라진 시멘트 바닥
흙이라곤 고춧대 박힌 스티로폼 박스뿐
골목에 나와 앉은 할머니들 옛 할머니들 아니네
아이들 소리 들리지 않는 골목
구급차 들어오고 나가면 그게 장례식인 골목
흙먼지도 물기도 싫어 슬픔이 지긋지긋해
쓸어내고 쓸어내어 미라처럼 말라가는 골목
노동과 함께 빠져나가 온기 없는 몸
정부 보조금으로 간신히 숨이 붙은 골목
오래된 낡은 공단 뒷골목
슬픔을 쓸어내자 온기도 달아난 골목
내 사랑 폐병쟁이 기침소리 그리운 곳
요양원 가는 차 붙들고
비에 젖은 흥건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몸서리치며 울던 여자
그 여자 흔적이라도 만나러 갔던 골목
슬픔도 없는 골목에서 나는 우네
슬픔도 없이 잠들다니
슬픔도 없이 죽어가다니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허수아비 - 백무산
주정뱅이 노인이 죽자
마을에는 귀신이 자주 출몰했다
노인이 사라지자 마을 공기가 가라앉고
사람들 눈길이 닿지 않는 구석이 부쩍 늘어났다
노인이 떠나자 집들의 담장 높이는 한뼘이나 자라났고
큰 소리로 떠들기보다 귓속말이 많아지고
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살림의 해진 밑바닥에 시커먼
헌데가 자꾸 드러나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였다
마을의 소음을 도맡아 일으키는 골칫거리였으나
노인의 이상한 혼잣말이 폐가를 돌아다니고 죽은 짐승들을 파묻은
썩은 구덩이를 든추고 음산한 다리 밑을 헤집고 다녔었다
가뜩이나 아이들 소리도 떠나고 없고
밤마실 끌고 다니던 이야기꾼 할머니도 작년에 떠나고
동네 궃은 욕을 도맡던 반벙어리 늙은이도 떠난 뒤에는
어두운 헛간이나 골목에서 귀신들이 사람들을 자주 놀래키었다
저녁이면 집집마다 마당 불을 일찍 끄고 티브이를 보거나
비슷한 처지들끼리만 어울려 속을 감추고 쑤군거렸다
귀신들 장난 때문에 가슴에 도사렸던 상처들이 불현듯 되살아나고
마음의 그늘이 잘 비워지지 않아 닦아도 닦아도 눅눅한 곰팡내가 났다
주정뱅이가 일으키던 분란과 대책 없이 낯선 말들이
마을의 퀴퀴한 그늘과 삶의 허방 구덩이를
파고드는 귀신을 쫓는 허수아비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이 생긴 이후 한번도 대가 끊긴 적이 없는
주정뱅이의 후계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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